루카 6,27-38
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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