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모두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하여 영적인 활기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 평화, 감사에 넘치는 신앙인으로 성숙하게 한다.
각 지체들, 세포들이 튼튼해야 몸이 튼튼하다. 교구와 본당의 지체적인 소공동체를 활성화 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교육하고 사목으로 배려한다.
모든 신자들이 각자의 위치에 이웃사랑 실천, 직장 복음화, 사회봉사활동, 사회운동 등으로 복음화를 이루어 나간다.
예수께서 특별히 12제자를 뽑으시고 집중 교육하시어 세상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듯이 교구와 본당에 필요한 조직을 만들고 간부들(사목위원과 단체 임원들)을 집중교육하여 그들을 통해 복음화 사업이 이루어지게 한다.
청소년들이 올바른 신앙으로 성숙하여 미래 교회의 주역이 되어 세상복음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속되는 관심과 후원을 한다.
수원교구는 지금까지 교구의 발전과 교구민들의 신앙생활 활성하를 이루기 위하여 교구장을 중심으로 사제단 모 두가 2001 년부터 시노두스 문헌을 따라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실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 울여 오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교구가 대형화됨에 따라서 대형화된 규모에 맞는 효율적인 복음화를 위하여 새로운 체제의 도입이 절 실히 요청되었습니다. 이러한 교구 현실의 요청에 따라 교구는 대리구제를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1. [소공동체 활성화]는 사목적 대전환을 마련한 계기로서 그동안 본당이 단체 중심의 생활에서 소공동체 중심의 생활로 변화하였습니다.
복음화국에서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수원교구의 [소공동체 활성하] 노력이 거의 모든 면에서 향상되었고 이는 앞으로의 소공동체 운동에 희망을 갖게 합니다.
지금까지 수원교구는 소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소공동체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신임, 기초, 심화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서 교구와 대리구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대리구제를 실시하면서도 주교와 사제단 그리고 신자들이 일치하여 소공동체를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수원교구를 더욱 복음화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2.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는 [소공동체 활성화]와 함께 수원교구의 미래를 여는 또 하나의 축입니다. 하느님 교회의 미래를 여는 이들은 지금의 청소년 신앙인들입니다.
청소년국에서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수원교구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노력에 대하여 어른들인 신부님, 수녀님, 회장님, 학부모님들은 많은 노력을 했고 성과도 있는 것 같다’라고 답하는 반면, 청소년들 자신은 초등부부터 시작하여 중•고생과청년들에 이르기까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요’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는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사목이 이루어졌을 뿐 ‘청소년들의, 청소년들에 의한 청소년 사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는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사목(Pastoral of, by, for youth)’을 통하여 청소년들이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여야 할것입니다.
가. 수원교구의 미래를 위한 현실 진단
수원교구는 지역적으로 볼 때 신도시 증가로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외적 성장 과 함께 내적 성장을 위하여 교구는 주교와 사제단 및 교구민들이 영성적으로 더욱 발전하고 보다사제들의 친교와 협동적인 활동 그리고 보다 많은 평신도들이 교회 삶에 적극 참여하는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사목 체제가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수원교구는 교구장의 교령 )을 통하여 대리구제의 실시를 선포하였습니다. 대리구제의 실시로 수원교구는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복음화를 위하여 보다 [친교의 교회]와 [참여하는 교히] 그리고 한국천주교 회의 특징인 [평신도 교회]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나. 수원교구 미래를 향한 대리구제
대리구제는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가 보다 잘 이루어지기 위하여 적절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대리구제의 정착은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의 활성화를 더욱 복음화 차원으로 성숙 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교구청과 대리구청의 모든 사제들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루어 나갈 것이며, 대리구 제가 정착됨에 따라 복음화를 위한 사목활동이 더욱 깊이 있고 활발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대리구제를 통하여 사제들의 친교와 영성이 고취되고 협동적인 사목활동이 많이 이루어지며, 사제들의 이러한 영성과 사목활동은 평신도들을 영성적 성장과 자신의 복음화와 이웃 복음화 그리고 지역 복음화로 인 도할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 가정은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보전 하고 전달하는 신앙의 학교요, [가정교회]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일차적인 공동체입니다.
가. 현 시대의 가정의 상황과 우리의 사명
현재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 중에 가장 큰 하나는 가정의 해체’로 드러나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구체 적으로 높은 이혼율, 수백만 건의 낙태, 저출산, 청소년 문제, 노령인구의 급증, 노인 문제의 증가 등으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와 구성원의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의 붕괴와 해체라는 사회적 현상에 맞서 가정의 성호B 위하여 우리의 모든 지혜와 역량을아낌없이 바쳐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복, 국가의 미래, 교회의 미래를 위한 길입니다. 우리 가 정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징표를 세상에 드러낼 것이고, 그씨앗은 세상의 복음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인들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나. 가정의 성화를 위한실천
가정은 사목의 대상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가정성화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 은 가정성호B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지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 며... 온가족이 교회의 전례에 참여할 때에, 그리고 나그네를극진히 대접하며, 어려운모든형제의 요구에 봉사하는 정의와 다른 선업을 증진할 때에 가정은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3)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의 성 호B 위하여 다음의 사항들을 실천해 나갑시다.
첫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대화하는 가정
가정의 성화를 이루는 결정적인 요소는 ‘부부 관계’입니다.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는그 무엇보다도 부 부가 신앙을 통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부부가 신앙과 사랑으로 가득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면 자녀문제를 비롯해서 가정의 거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고 증언합니다.
둘째, 가족 구성원들이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생활하는 가정
가정 성화의 첫걸음은 ‘가정 기도’입니다. 오늘의 사회 현실이 가족 구성원들을 흩어놓는다할 지라도 가 정기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을 생활화할 때 기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봉독하고 실천함으로써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의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중요한 신앙 교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가족 구성원들이 성사와 전례에 참여하는 가정
신자 부모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전례에 참여하여 성사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아야 합니다. 또한 자 녀들에게 유아 세례와 첫 영성체, 견진 등 성사적 은총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넷째, 가족 구성원들이 사회복지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가정
주 5일 근무 제도로 인하여 비그리스도인들도 사회복지와 지역사회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신앙인들은 자녀들과 함께 사회에서 소외되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활동을 함으 로써 사랑의 실천에 앞장 서는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라고 사도들이 받은 이 장엄한 명령대로 구원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5) 교회는 사 제직과 예언직, 그리고 왕직을 수행하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원교구는 교회의 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주교와 사제, 수도자, 평 신도들이 일치하여 지역사회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모든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구가 의욕적으로 새로이 시작하는 대리구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구 공동체가 더욱 친교를 이루고 성화되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교구의 사목목표에 따라 소공동체 활성 화에 매진하고, 청소년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가정 교회"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은 독특한 방법으로 교회의 신비의 산 모상이요 역사적 표현이므로6) 우리들 가정의 성화를 통해 교회의 삶과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봉사해 나갑시다!
주님의 빛이 여러분의 가정과 소공동체와 본당을 항상 밝혀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교구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 성모님의 전구로 수원교구가 제1차 시노두스를 마치게 됨을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교구의 쇄신과 변화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그 동안 교구 시노두스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신 시노두스 위원회와 사무국 관계자들께 감사드리고 시노두스 폐막 미사를 봉헌하게된 데 대하여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의원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많은 교육과 회의들을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수원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교구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고 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 내에는 일련의 시노두스들이 개최되었습니다. 주교 시노두스와 대륙, 국가 시노두스 그리고 교구 시노두스 등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복음화의 일환으로 개최되고 있는 세계 교회의 이러한 시노두스 개최 행렬에 발맞추어 수원교구도 2000년 대희년을 잘 준비하려는 목적과 21세기, 제 삼천년기의 변화하는 세상에 부응하는 교구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으로 제1차 교구 시노두스를 개최하였습니다.
전임 교구장님이신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1996년도 사목교서를 통하여 수원교구가 시노두스를 개최할 것임을 말씀하셨고 제3대 교구장 주교가 1997년 10월 9일 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합동 총회시에 교구 시노두스 개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교구민들의 의견을 들어 시노두스 의제로서「 소공동체 활성화 방안」과「 청소년 신앙 생활 활성화 방안」의 두 가지를 확정지었습니다.
소공동체 의제는 교회의 기초를 다진다는 면에서, 그리고 청소년 의제는 교회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면에서 중요하기에, 우리는 의제 선정에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이 같이 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각계 각층별로 시노두스 교육을 하고, 의안 초안을 1차 검토하였으며, 각 지구 단위 시노두스를 거쳐 의견 수렴을 하고, 두 번에 걸친 본회의를 가져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963년 10월 7일 교구 설정 당시 수원교구는 한수(漢水) 이남 경기도 지역으로 1개 시와 10개 군을 관할하는 농촌 교구로서 성직자 29명에 본당 24개였고, 신자 수는 42,548명으로 인구 대비 신자비율은 3.2%였습니다. 그러나 교구 설정 37주년인 2000년 12월 31일 현재에는 16개 시와 3개 군을 관할 구역으로 하며, 성직자 239명에 본당 128개가 있고, 총인구 5,954,538명 중 신자 수 505,601명으로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8.49%가 되었습니다.
4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가난한 농촌 교구로부터 출발하여 본당을 100개 이상 분할하고 성전을 신축하는 큰사업을 수행해 냈고, 신도시 확장에 의한 인구 유입과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신자 수가 많이 늘어났으며, 독자적인 교구 신학교 설립으로 사제를 안정적으로 양성하여 복음화 사업에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까지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교구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 성모님과 한국 순교선조들의 도움이 계셨고, 교구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많은 기도와 헌신적인 노력들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가 이처럼 전형적인 농촌 교구로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도시 지역이 더 많은 교구로 발전하였으며, 성직자 수와 신자 수도 거의 10배로 성장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전국 교구에서 두번째 큰 교구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구의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도 수원교구 통계와 복음화 보고서 분석 결과에 나타난 수원교구 복음화의 주요 지표들은 충격적입니다. 영세율과 주일미사 참여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냉담자와 거주 미상자는 점차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표상으로 나타난 중요 요인들의 상호 역학 관계를 볼 때에, 외적인 영세율과 주일미사 참여율의 하락세, 그리고 냉담자와 거주 미상자의 증가 문제는 교회 내의 삶 자체인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 자체가 천주교 신자로서의 믿음을 굳게 해 주고, 정체성을 가지게 해 주며,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게 해 주지 못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들의 내적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에 외적인 선교 활동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수원 교구의 구역·반 모임 실시 현황을 보면, 매주 한 번이 18.6%, 매월 한 번이 53.6%, 미실시도 20.8%이고, 반모임에 신부님이 참석하는 것은 52.5%임을 감안할 때, 소공동체가 활성화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과 청년들의 현주소는 더욱 암담합니다. 초등부 주일학교 재적율이 68.4%이고, 중등부는 18.4%, 고등부는 13.1%로 매우 낮은 상태이며, 20대 청년들은 대다수가 교회를 멀리 하고 있는 상태로서(1999년복음화 보고서 참조)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신앙 생활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미 감지한 수원교구민들은 시노두스 의제를「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로 선정하기를 가장 많이 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공동체와 청소년 문제만 해결한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원교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같은 동포인 북한 동포를 도와야 하고, 중국 선교와 구 소련이었던 중앙 아시아 나라들과 러시아 선교까지 한국 교회가 맡아 주기를 원하시는 교황님의 말씀도 따라야 하겠습니다. 또한, 수원교구는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요 요람이며,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고 성지가 많은 교구로서, 신앙의 선조들을 잘 본받음으로써 교구 고유의 얼굴도 가져야 하고, 복지 사업과 학교 사업 및 여러 가지 문화 운동을 통하여 복음 정신이 지역 사회와 우리 문화를 변화시켜 나가는 일도 잘 해야 합니다. 교구 설정 50주년인 2013년에는 교구민이 약 93만 5천 명이 될 것으로 예상되니, 3000명 신자기준으로 143개의 본당을 분할해야 하는 등 막대한 재정적 뒷받침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직자 영성과 평생 교육 문제 등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수원교구가 시대에 부응하는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민이 모두 기도하면서 일치 단결하여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소공동체 문제와 교회의 미래가 걸린 청소년 문제만 확실히 타개하여 나간다면, 수원교구는 획기적인 발전을 볼 수 있는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소공동체가 활성화되어 믿는 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공부하며, 함께 선교 활동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까지 이르면 신자들이 체험적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기쁨과 내적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며,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신앙 생활에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신앙인들이 질적인 성숙이 이루어져, 성사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선교 의지도 높아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공동체의 활성화」는 바로 본당의 대형화로 인한 익명화, 신앙과 삶의 유리(遊離), 냉담자 그리고 선교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입니다.
또한, 이번 시노두스에서 마련된 청소년들을 위한 종합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21세기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확실히 찾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날 수 있다면, 교구 복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들이 나올 때에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방황하는 국민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와 문화를 복음 정신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전 교구민의 중지를 모아 마련된 이 시노두스 결과문에 분명히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으로 마련한 이 결과문이 하나의 문서로서가 아니라, 충실히 구현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교구 복음화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며 이러한 일들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구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 성모님의 전구를 빌고, 한국 순교 선조들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중략)
※ 중략에 해당하는 부분은 시노두스 결과문으로서 분량이 많고 또한 별도로 배포되는 관계로 생략함.
수원교구는 이번 시노두스를 통하여 21 세기에 부응하는 새로운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복음화 방향과 방법들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시노두스를 시작할 때에 2,3개의 의제만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단출한 시노두스 결과문을 가지고 교구 전체가 집중력 있게 구현시켜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인 이론에 그치는 문서를 남기는 시노두스가 아니라, 시노두스를 마친 후 전력을 다해 실행에 임하는 시노두스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에따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한 시노두스 결과문이 나왔고, 이는 시노두스 실현에 대한 교구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제 본 주교는 온 교구민이 수년 간 의견을 모으고 회의를 거쳐 건의한 시노두스 결과문을 받아들여 오늘 반포합니다. 이 시노두스 결과문은 21세기를 살아갈 수원교구의 ‘새로운 복음화’ 정책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히 정해졌으니, 우리 모두 실현의지를 불태우며 힘을 집중시키고, 조직과 시간과 재정의 지원을 통해서 시노두스 결과문을 구현해 나아갑시다!
물론 시노두스 결과문의 구현으로써 수원교구가 복음화의 모든 측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내적 성숙인 자신의 복음화와 세상 복음화를 위하여 요람의 구실을 하는 소공동체의 활성화와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청소년 신앙 생활의 활성화를 이룸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면, 수원교구는 앞으로 더 큰 문제들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노두스의 성공적인 구현이야말로 수원교구가 다른 많은 일들도 이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고, 희망찬 교구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이 시노두스 결과문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교구민 모두가 장기간에 걸쳐 결의하여 만들었고 교구가 의지를 가지고 정책적으로 펼치는 일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교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교구적으로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수원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여러분! 시노두스의 성공적인 구현을 위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로, 청소년에 관한 결과문은 거의 ‘청소년을 위하여’ 라는 측면만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청소년을 위해서 교회가 앞으로 많은 지원과 관심과 사고의 전환을 해야할 필요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님들의 그릇된 사랑이 자녀의 ‘과잉보호’를 낳듯이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도 반복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2002년 7월 25일에 캐나다에서 열릴 ‘제 17차 세계 청년의 날’ 메시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청소년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3-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청년들이 세상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 오시어 청소년 사목에 대하여 강의를 하신 인도 코이카라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은 청소년에게(to youth), 청소년과 함께(with youth), 청소년에 의해서(by youth), 청소년을 위해(for youth)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 사목은 ‘청소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밖에 여러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고, 또,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교회의 사목적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사도직 활동의 주체들이며 협력자들”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사목자들은 “젊은이들에게 사회와 교회의 미래를 위한 그들의 책임을 상기시키고,그들이 이러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아시아 교회 47항). 또, “사목자들은 청소년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이끌고, 나아가 그들 스스로 동료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도록 안내해야 한다.”고 코이카라 신부님도 강조하십니다.
둘째로, 소공동체와 청소년들에 관한 시노두스 결과문들이 잘 실현되고, 이로써 친교 교회적인 교구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소공동체와 청소년 복음화 담당 신부님들의 모임, 지구 내의 구역 분과장 모임, 그리고 청소년·청년 분과장 모임이 잘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지구별로 정한 요일에 반 공동체 모임이 잘 지켜지고, 본당마다 달리 요일을 정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 밖에 지구 청년 사도직 협의회 구성 및 운영이 잘 이루어지고, 지구별 청소년이나 청년 연합 미사 및 지구별 청년 성령 기도 모임과 선교 행사 또한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수원교구의 당신 자녀들을 굽어보시고 사랑과 은총으로 돌보아 주시어 교구 제1차 시노두스를 마치게 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시노두스의 구현을 위해 섭리하여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교구의 복음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많은 과제들을 바라보면서 시노두스를 성공적으로 구현시켜 나아가야 하는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을 주님께 약속드리며, 선교사들이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님께 조선 천주교회를 맡겨드린 그런 심정으로 우리 교구를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 성모님과 한국의 순교 선조들께 의탁하며 도와 주시기를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본당, 수도원, 가정에 평화와 기쁨 그리고 사랑을 가득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2000년대희년, 성년을 은혜로이 지내고, 새 천년기를 맞으면서 교구는 오늘날의 변화된 시대와 세상의 도전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효율적인 복음화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식 정보화 세상으로 점점 더 변하고 있으므로 복음화와 청소년을 위해서 인터넷 복음화에 힘을 쏟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남북통일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하며 실질적인 협조와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뿐 아니라 우리 교회 내에서도 실질적인 봉사자인 여성들의 권익이 더욱더 신장되어야 하고 평신도 인재양성과 사제들의 평생교육 등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복음화 자세와 방법만이 우리 교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사회를 위하여 필요한 존재가 되며 교구 자신도 더 성장하는 길일 것입니다.
천주교회에는 공의회나 시노두스를 개최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당면한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공의회를 개최해왔습니다. 또한 복음화 차원에서 교회는 로마 주교 시노두스를 비롯하여 대륙별 시노두스를 개최해왔고 교구마다 시노두스를 열어 새 시대에 맞는 새 복음화를 모색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수원교구는 새 천년기를 맞아 제1차 교구 시노두스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원교구 시노두스의 목적은 “새로운 복음화의 길 찾기”에 있습니다. 즉, 교구가 새 천년기를 맞으면서 당면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기울여오던 복음화 노력들을 뒤돌아보고,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찾아 온 교구가 힘을 모아 함께 노력해 나가자는 것이 이번 시노두스의 목적입니다.
시노두스(syn+hodos)라는 말 자체가 “함께 길을 찾고, 함께 그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수원교구는 교구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서 [교회 기초 공동체]와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라는 두 가지 분야를 채택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화 분야들도 중요하고 쇄신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특히 위의 두 복음화 분야들이야말로 교회의 운명과 미래가 걸린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기초 공동체”는 교우들의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장(場)으로서, 교회의 운명이 여기서 승패가 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대형화와 집단화, 그리고 (대)도시의 익명화와 사제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역동성과 일치성, 소속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우들이 “교회 기초 공동체”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 공동체로서 많은 문제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하고, 스스로해결해 가며, 스스로 복음화를 실천해 나가는 등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교회 기초 공동체야말로 신자들이 복음화 되고 이웃을 복음화 시켜나가는 “복음 선교의 못자리가 되고, 더욱 큰 공동체 특히 지역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제58항).
“교회 기초 공동체” 의안은 ‘바쁜 현대인들이 매주(적어도 월에) 한 번 모임을 가질 수 있고 이 모임이 명실공히 교회 기초 공동체를 이루어나갈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교회 기초 공동체는 현대인들이 신앙을 지켜나가고 키워나가는 못자리로서 그리고 작은 교회공동체가 복음 선교와 사 회 복음화 사명을 실현시켜 나가는 장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하는가?’ 하는 방향을 잡고 길을 찾아나가며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이의안의 과제입니다.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 문제는 교회가 현재 당면한 문제 중 가장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분야라고 여겨집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은 지금 “남을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는 신앙의 논리와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밟고 죽여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논리사이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고, 입시 위주와 출세중심 사회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다른 젊은이들처럼 감각적인 즐거움을 찾고 개성과 개인주의를 중요시하는 X 세대이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보다 기술 문명에 더 희망을 걸고 사는 N 세대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앙 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에 흥미와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을 힘들어하지만, 때로는 영원한 가치와 영성에 대한 갈망을 갖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싶어합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관계 및 소속감을 갖기를 갈망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성당에 와도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교회의 자세가 부족하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봉사하며, 스스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현재 교회가 그들에게 제시 하는 것은 주로 청년단체에 들어가 활동을 하거나 성서공부를 하는 것인데, 그들이 단체에 들어가거나 성서공부를 하기위해서는 많은 경우에 지구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 여부에 교회의 미래가 걸려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래의 교회를 책임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이 열심한 신앙인들이 되고 교회를 책임질 미래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의 일꾼으로서 육성되어야 교회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젊은이의 신앙 생활”의안은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그들이 교회의 꿈나무들로 커갈 수 있는가?’하는 길을 찾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는가?’ 하는 것이 이의안의 과제입니다.
수원교구는 지금 제1차 시노두스를 개최하고 있고, 그 본 회의 시기가 진행 중입니다. 이 본 회의 시기는 지금까지 본당과 수도회, 단체들 차원에서 논의된 것들을 바탕으로 만든 두 의안을 지구 차원에서 그리고 교구 차원에서 검토하고 첨삭하여 교구의 복음화 정책 및 방침으로 정해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2001년 중순경부터는 시노두스를 통하여 나온 결과문을 수원교구민 모두가 함께 실천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수원교구는 21세기를 맞아 주님께서 바라시고 우리 사회가 바라는 복음화를 실현시켜가고 이로써 새 천년기를 맞는 교회로 탈바꿈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수원교구의 2001년은 새 천년기 복음화를 펼치기 위하여 훌륭한 ‘설계도면’을 그려내는 해이고, 함께 만든 ‘설계도면’을 따라 ‘건축시공’을 시작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건축에 있어서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잘 아는 바입니다. 따라서 수원교구 성직자·수도자·평신도 지도자들은 ‘설계도면’을 완결시키는 장(場)인 교구 시노두스 본 회의의 성공적 마무리를 위하여 모두 함께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참여해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다른 한편 비록 설계도면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만일 시공을 안 한다면 그 도면은 안(案)으로만 남아있게 되고, 시공을 잘못하면 부실 공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수원교구 성직자·수도자·평신도 여러분은 ‘설계도면’을 그리는 일과‘건축시공’을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는 제1차 시노두스 본 회의를 통하여 두 가지 의안을 끌어안고 오랫동안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며 함께 결론에 이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을 다하여 서로를 들으며 긴 회의 시간을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모두는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룩한 교회안에 성령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노두스 결과문의 실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정신과 교구민의 자세는 교구 시노두스 결과문 실현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을 함께 결정하였으니 함께 실현시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시노두스 과정에서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하더라도 일단 결정된 사항에 대하여 따르는 것이 민주시민의 기본 자세이고, 교구장이 교구민들의 모아진 의견을 듣고 선포한 것을 따르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요 교회 정신입니다. “남과 함께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남을 위하여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교구민 전체가 함께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미래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때 비로소 죄 많은 지상 교회이지만 다른 한편 “거룩한교회”임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1996년 전임 교구장님께서 사목교서를 통하여 교구 시노두스를 개최하시겠다고 발표하신 후 지금까지 교구 시노두스를 위하여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시노두스를 마무리하기까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힘을 모으고 인내를 키워나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정한 길을 함께 실현시켜 나갑시다. 저는 교구장으로서 제1차 수원교구 시노두스의 성공적 마무리와 결과문의 실현을 위하여 다음 세가지를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첫째로, 기도합시다!우리 믿는 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칩니다. 그러므로 제1차 수원교구 시노두스가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바쳐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참여합시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표들은 시노두스 본 회의에 적극 동참하여 교구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실천합시다!시노두스 결과문을 실현시켜 나가는데 함께하여 교구민 모두가 수원교구의 멋진 미래를 일구어 내는 주역들이 되시기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기를 빌고
교구 시노두스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성모마리아께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 2000돌을 기념하는 2000년 대희년을 맞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원교구 모든 교우들과 그 가정 그리고 본당들과 수도 공동체들, 교구내 기관, 시설, 단체들에게 2000년이 참으로 대희년이 되고 성년이 되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2000년 대희년을 잘 준비하고 잘 거행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로부터 많은 자료들이 나왔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제삼천년기」,「주님의날」, 「강생의 신비」등.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대희년 길잡이」1,2,3,4「대희년맞이」1,2,3,4,5 한국 주교단 공동 사목교서:「대희년을 바라보며」,「1999년 '성부의 해' 본당교육 자료」 등)
수원교구는 대희년 맞이 준비를 위하여 대희년위원회를 가동시켜 준비해 왔으며「(수원교구 2000년 대희년 준비의 기본방향」「2000년 대희년 준비를 위한 교육 및 피정자료」「대희년 준비 반모임 자료」「대희년 강론자료」몇 차례에 걸친 대희년 준비 사제 연수회 동) 대희년 맞이의 일환으로 제1차 교구 시노두스를 개최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수원교구는 대희년을 맞아 무엇보다도 먼저 탄신 2000돌을 맞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촛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2000년이 대희년이 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께 축하를 드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희년을 지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으시게 대희년을 지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도구가 되어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잘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돌아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회개:고해성사와 대사) 우리를 회개로 불러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 즉 성체성사와의 일치와 성서 말씀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되는(쇄신:주일미사 참례와 매일 성서 말씀 생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 생전에 전념하시던 것처럼 이웃과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이야 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2000년 성년을 잘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제삼천년기 세상 복음화의 길을 닦아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대희년 위원회는 지금까지 2000년 대희년을 위하여 나온 모든 자료들의 정신과 계획들을 기초로 하여 교구 대희년 목표를 "교구 쇄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로 정하고, 교구민 모두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은총과 기쁨의 대희년을 맞을 수 있도록 성화운동 선교운동, 증거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년은 그 본성상 우리를 회개와 쇄신으로 부르고(「제삼천년기」11, 12항) 생활의 변화로 드러나게 되는 증거의 삶에로 이끕니다. 따라서 성화운동으로 월 1회 고해성사를 받는 것과 성년 동안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번 순례 지정 성당이나 성지를 순례하거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대사를 얻으며, 수원교구 교우들 모두가 성년을 맞아 모든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성화운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오신「우리 가족찾기 운동」과 「새 가족 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성년을 지내며, 수원교구의 복음화율이 10%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교운동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도·농 본당간의 자매결연처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남과 북이 화해하며, 자연과도 화해하는 것이 증거운동의 목표입니다.
교구 시노두스위원회는 「교회 기초공동체」와 「젊은이의 신앙생활」 두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 말씀하신 회칙「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교회의 기초공동체를 가리켜 "교회의 활력의 표지이자 신자 양성과 복음화의 도구로서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51항)이라 하셨고, 젊은이들을 가리켜 "교회의 희망"이라고 부르시며 (그리스도교 교육선언 2항), 그들은 사목의 대상만이 아니라 복음화의 주역으로서 사회개혁의 참여자로서 교회를 쇄신하여(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46항) 제1차 수원교구 시노두스는 교회의 이 두 중요 영역들을 위한 좋은 방향과 방안들을 함께 찾아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원교구민 모두와 본당을 비롯하여 교구 모든 기관과 공동체들은 성년 동안 시노두스에 적극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역교회인 수원교구의 미래를 함께 열러가 주시기를 청합니다.
2000년 대희년의 의미가 무엇이며, 기본 구성요소들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자료들이 나와 있습니다. 수원교구는 대희년위원회를 통하여 대희년 준비를 하여 왔고, 대희년 위원회가 오랫 동안 수고하여 이미 대희년 실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았기에 이번 사목교서는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교구 대희년 위원회가 내놓은 대희년 프로그램을 따라 살고, 교구 시노두스를 성공리에 마치도록 노력함으로써 탄신 2000주년을 맞으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기에 믿는 이들인 우리도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수원교구 사제, 수도자,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주님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신 2000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을 잘 준비하기 위하여 3년에 걸쳐 우리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이 신비를 바탕으로 성자의 해(1997년)와 성령의 해(1998년)를 거쳐오면서, "우리 자신의 복음화"와 "이웃전교" 그리고 "세상의 복음화"를 일구어 왔습니다. 1999년은 성부의 해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것이 2000년 대희년 직접준비 3년간의 촛점"임을 알수 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 준비 마지막 해인 올해는 "성부 아버지의 해"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첫 단계는 하느님께서 잘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거듭 거듭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탕자와 다를 바 없는우리에게도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느님 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처럼,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에 감격하여 주님을 선포하는 개개인이 되고 교회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옛부터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려 들지않고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겨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신"을 섬겼고 오늘날에도 "돈"이란 우상, "발전"이라는 우상, "더 잘살기 위하여"라는 우상, 그리고 신흥종교, 뉴에이지운동… 등 그 이름이야 어떻든 여러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현대를 가리켜 '아버지 부재시대',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라 합니다. 적지 않은 수의 청소년들이 할 수만 있다면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나려 하고, 결혼 한 자녀들도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볼 때 부모를 경히여기는 사람은 형제들 간에도 화목하지 못합니다. 형제간의 우애란 부모님을 잘 모시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경시하는 사람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 되어서 형제들 간에도 다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를 잃게 되면 우리 인간은 피조물인 자신의 정체성도 잃게 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힘(공동체성)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예언자들을 통해서 외치셨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 이스라엘아 들어라!(말좀 들어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39f; 신명 6,5 참조).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시고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마태 22,39f; 레위기 19,18 참조) 동전의 앞뒤와 같다 하셨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봅시다. 우리는 지금 참 하느님을 버리고 우리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를 섬기고, 형제를 죽이고 자신만 살려는 카인처럼 살고 있고, 과학기술의 발전에만 의존하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분명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큰 조류가 현세주의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있고, 그 결과로 윤리도덕의 타락과 생명경시 및 환경파괴로 죽음의 문화가 만들어져서, 이제는 역으로 우리 자신이 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극도의 이기주의와 만연된 부정부패로 사회전반에 불신이 팽배해져, 가정에서부터 사회전반까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생활이 점점 불가능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개개인의 잘못된 삶과 가정의 파괴,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생활에서 연유한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불행에서 우리가,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불행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를 믿고 섬기고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서로가 형제자매처럼 살아갈 때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비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스러운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시나이 광야에서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듭 자비를 베푸셨고,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신 데에서 이를 잘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기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지난날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시고 안아 주십니다. 모세와 이사야 예언자와 사도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신로 할 수 있고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구약성서에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나뉘어 불리운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성부와 파견하신 성자, 그리고 성화를 이루시는 성령 삼위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장면 때 삼위의 구별이 잘 드러났습니다.
신약성서에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421번 나오는데, 그중 183번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으로, 예수님 친히 "아버지"라 하신 것은 170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아버지"란 용어는 분명히 하느님께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태 16,17).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하셨습니다(마르 14,36). 이것은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주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사용 하는 통속적인 용어로서, 한국말로 하자면 "엄마", "아빠"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용어를 기도문에는 절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평상시에 "아빠"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내적인 깊은 결속관계와 유일무이한 신뢰관계 및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독특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마태 8,3)"는 가르침과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마르 10,15: 루가 18,17)"는 말씀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친자 관계와 우리의 자녀 관계를 엄격히 구별하시며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요한 20,17)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미태 6,9)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을 뿐, 그 외에는 절대로 예수님과 우리를 향해서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나의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이신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같은 하느님 아버지이시지만 그 관계성이 다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은 친아들이신 당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양자녀들을 구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성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친아들이시며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양자로 삼아주심으로써,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그분의 지체들로 삼아주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친자로서,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은 양자로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친아들을 보내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뵙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셨고, 성서 다른 곳에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보면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심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달아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어떻게 모시고 섬기고 사랑하며, 어떻게 이웃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분명히 드러내셨고(갈라 4,4),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당신 사랑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인 "탕자의 비유"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통해서 입니다.
탕자의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라 일컬어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라 표현해야 더 잘 맞을 것입니다. 이 비유 말씀에서 작은 아들의 근원적인 죄는 아버지의 유산을 마구 탕진하고 윤리적으로 죄의 생활을 한 데에 있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가버린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맺어져 있는 사랑의 관계, 부자관계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소위 「자유와 행복과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을 가지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요, 이것이 죽게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떠나가는 작은 아들을 억지로 막지 않으신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떠난 다음 작은 아들을 잊지 못하시고 늘 기다려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아직 먼 거리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당신의 작은 아들을 알아 보셨습니다. 한자로 부친, 모친 할 때의 "親"자는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설 立자와 나무 木자 그리고 볼 見자로 이루어진 이 글자는 아버지께서 나무 위에 올라가셔서 앉지도 않으시고 서시어 아들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신 것을 잘 나타냅니다. 저만치 오는 아들을 보시고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작은 아들을 향해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신 다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이에 화가 난 큰 아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루가 15,32) 하시며 아버지의 자비스럽고 기뻐하시는 마음을 잘 보여 주십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작은 아들의 돌아옴은 하나의 재창조, 새로운 탄생과도 같았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있어서 회개의 길, 재생의 길 역시 아버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사는 길이요,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화해하는 길이었으며, 아들로서의 모든 것이 복권되는 길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루가 15.18-19).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실제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요 굴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이 길 밖에 더 이상 살길이 없을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마음을 읽으시고는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더 묻지도, 다짐을 받지도 않으시고 그에게 자격을 모두 복권시켜 주시며 기쁨에 넘쳐 큰 잔치를 벌여주셨습니다. 작은 아들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잘못을 용서받았고 자기가 스스로 버렸던 모든 권한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아들편으로 볼 때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아버지의 비유를 드신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지극한 정을 품고 계신지를 알 수 있고, 아울러 둘째 아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지극한 정성을 쏟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성심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잘 드러납니다. 부자 사이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사랑이었습니다. 아들이 비록 탕자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도리에 성실하셨고, 탕자가 된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당신의 성실성 때문에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자비를 입고 죽음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비의 체험은 자비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큰 기쁨이 됨은 물론이요, 동시에 자비를 입는 사람에게도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게 하고, 자신의 아들로서의 권리를 되찾도록 하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참으로 오묘하고 지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많은 병자들, 마귀들린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일생동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요한 8,29)만 하셨습니다. 그러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때와 성 금요일 십자가 상에서는 자비를 입어야 할 분이 되셨고, 자비를 호소해야 하는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자비를 입지 못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병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아버지의 자비를 증거하셨으나, 정작 당신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갈바리아 산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입지 못하고 엄청난 번민과 불안, 온갖 모욕을 받으신 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살려내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2고린 5,21)고. 즉,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 때문에 수난과 십자가 형을 겪으셨으니, 이는 전적으로 사랑에서 나온 행위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또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 예수님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요한 14,9) 것이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 봄으로써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무엇까지 해 주시는 분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의 십자가상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보다도 더 강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민구원을 위해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당신 아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드디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셨고, 죽음보다도 더 강한 아버지의 사랑을 체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지극하신 사랑이 궁극적이고도 결정적으로 드러난 신비인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부활은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대표적인 속성
하느님의 속성들은 사랑, 정의, 용서, 전능, 영원… 등 많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 불릴 때 창조, 엄위, 권위, 규율, 인도하심, 보호 등의 내용이 포함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인자하심, 자비, 당신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돌보심과 사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님의 신적인 부성(父性)에 대한 마지막 용어는 하느님의 알아듣기 힘든 자비와 용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을 통해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속성들 중에 대표적 속성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영어로 compassionate love, 우리 옛 기도문에서 나오는 긍휼히 여기심(惻隱之心),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용어로는 자비로운 사랑이라고들 합니다. "자비야말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메시지의 근본내용을 이루며, 그리스도 사명의 본질적 능력을 이룹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딱한 사정을 보시고는 당신 마음이 아픈 나머지 결국 도와주시고 마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비는 내적인 마음 태도이고 사랑은 자비가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의 최고의 속성은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하고서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등, 거듭 거듭 잘못을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통해서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처럼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다 보면 아버지로서의 하느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어머니다운 면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는 비유나 어머니가 자녀를 찾으러 다니듯이 잃어버린 양 하나 하나를 찾으러 다니는 사랑 가득한 모습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강조될 때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모습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잘 표현하고 더욱 잘 이해하려면 "아버지 - 어머니"이신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언어적 한계 때문에 하느님께 아버지라는 부성(父性)을 붙이게 되지만, 사실 하느님은 아무 성(性)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어게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우 분이시고, 어머니와 같이 자애로운 분이시며 언제나 우리의 딱한 사정이 가슴 아프셔서 우리를 돕고야 마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탕자처럼 결단을 내리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얻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대표적 속성인 자비가 특히 정의와는 서로 상충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정의가 객관적 이고 외부적인 선익을 공평하게 상호분배하는 데 이바지 한다면, 자비는 정의의 원천을 이루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 복귀시키고 사람들을 서로 융화시키는데 이바지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자비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탕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비를 입으려면 반드시 정의가 기본구조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관대한 용서를 원한다면 객관적인 정의가 먼저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정의는 자비에 봉사하는 것이고, 자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 상호관계를 형성하고 좀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필수적인 기본요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늘 우리에게 무슨 요구를 하시는 분으로, 또는 엄하고 가부장적인 분이셔서 우리가 잘못하는 것만 따라 다니며 노려보고 야단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본 것처럼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또다른 한편, 하느님께서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도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세상과 인간을 위한 하느님」 즉, 남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것이 모든 구약성서적 계시내용의 중심사상이며, 기본이 되는 주제이고 성서적 하느님 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에게 봉사하는 하느님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르 온 것이다"(미태 20,28).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자비로운 하느님 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하느님 상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다음과같은 분이십니다.
첫째,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졌더라도 아버지께 돌아와 죄를 고백하면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비의 하느님, 자비로운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신뢰가 바로 회개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참으로 깨닫는 사람은, 달리 표현해서 하느님의 진실된 모습을 '뵙게' 된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며,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배반한 다음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신 눈길은 질책이나 경멸 또는 미움의 시선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 나와 회개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에 이어 두 번째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주님의 참다운 사도가 되어 제일 먼저 복음전파를 하기 시작하였고 끝내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말살시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불리움을 받고는 이 신비를 묵상하고 자신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 위해 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회개하여 일생동안을 주님의 복음 전파자로서 헌신하였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복음이란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온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의 저자가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1,3),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당신 자녀로 삼아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1,6)를 거듭 세 번(1,12:1,14) 반복한 데서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위력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켜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고, 감사드리며 자신이 주님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여 봉사하게 됩니다.
철부지 자녀가 자신의 먼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웃 형제도 모르며 부모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데 반해, 철이든 자녀. 성숙한 자녀는 무엇보다 먼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애쓰기 때문에 형제들과도 우애있게 지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안에서도 성숙한 자녀는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려 애쓰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힘쓰며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성숙한 자녀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나게 하는 방법으로써 자식이 출세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을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하는 성서적 방법론은 남을 위해 내가 죽는 사랑의 방법으로써 누룩처럼, 소금처럼, 촛불처럼 우리가 불쏘시개가 되어 사랑의 혁명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는 데 장애되는 요소는 첫째, 비판 일변도의 태도이고, 둘째, '우리가 해 봐야 새발의 피지' 하며 회피하는 태도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음식과 음료로 주셨고, 우리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하시며 당신의 모범을 따를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요한 6,38), 아버지의 뜻만 따라 사셨으며(요한 4,34),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하셨습니다. 신앙인이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모님,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모두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큰 도구가 되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구원사업을 위해서는 유식하고 유능한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그 런데 교회 안에서 봉사자들을 얻기가 힘이 듭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란 <가야할 길>과 <가고 싶은 길>중에 가고 싶은 길을 포기하고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철부지로서가 아니라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려면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받들어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나 자신부터 도구가 되어 하느님 사업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봉사자가 될 신앙인은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를 만들어 말로써, 그리고 삶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고 증거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성숙한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세말까지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라는 격언처럼, 우리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려 들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자비 체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체험은 기도를 통하여, 성서에 있는 하느님 말씀을 읽고, 쓰고, 묵상하고, 생활화함으로써, 주일마다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냄으로써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복지시설에 가서나 이웃사랑 실천을 통하여, 끝으로 순례를 통하여 다져질 수 있을 것입니다.
회심운동
1999년 "성부 아버지의 해"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주일미사 참례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 크신 자비를 깊이 체험하는 한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주일미사 참례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주일미사를 주춧돌로 삼아 모든 신앙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매주 미사 참례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해 지고 내적 힘을 얻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육체가 하루세끼 음식물을 섭취하고 소화시켜 에너지를 공급받아 그 힘으로 살아가듯이, 천주교 신자들은 적어도 매주 미사참례를 통해서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을 통해 하느님의 영적음식을 받아 먹음으로써 영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설문조사를 통해 보면,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비신자들까지도 미사전례의 거룩함과 아름다음, 그리고 신부님들의 강론을 천주교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신자들은 실제로 매주 미사를 통해서 가치관의 변화를 얻고 개인생활에 큰 도움을 받으며 점차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주 미사참례가 의무라기 보다도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일찍이 주일의 의무를 신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한주일 동안 세상에서 산 다음에 매주 주님께로 돌아가 미사성제로써 재중전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모든 신앙인들이 고채성사를 통하여 탕자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와 아버지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는 한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 자비 체험의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고해성사를 모든 신자들이 잘 보기 위하여 성사를 베푸는 사제쪽과 성사를 받는 교우 모두 잘 준비하고 잘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참회에로 인도하는 훌륭한 강론과 잘 준비된 참회예절 - 특별한 재의 수요일 행사로서 양심성찰을 잘하게 하고 - 특히 판공성사를 보는 기간인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십분 이용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충분한 고해시간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냉담자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가정방문시에 고해성사를 받도록 배려하고 문제가정,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면담일을 주중 하루로 고정시키는 것도 필요하리라 봅니다. 순례성당이나 성지에서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이끌 수 있도록 사목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보속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밤샘기도를 바치셨듯이 밤샘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간 죄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신뢰를 저버린 죄에 대하여 보속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깊이 체험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사제들이요, 수도자들이며 본당에서는 사목위원, 구역장, 반장, 주일학교 교사들, 그리고 단체 간부들입니다. 이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고 모범을 보여주며 그 사람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주로 가장들과 청소년들이 아버지께 나아와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하여야 하겠고, 깨진 가정과 위험중에 있는 가정과 부부들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본당에서는 냉담자 회두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수원교구내 여러 본당에서는 이미 잃어버린 가족(양)찾기 운동을 벌여 많은 사람들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본당들이,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잃어버 린 가족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수원 교구민 모두는 회심운동으로 매달 고해성사, 매주 미사 참례, 그리고 매일 성서말씀 생활을 실천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 전체가 회개와 생활쇄신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일시에 완결되는 것이기 보다는 일생을 두고 꾸준히 실천하여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입기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 곧 하느님의 자비를 계속해서 더욱 많이 입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이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되어 자기 이웃을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 상호관계에서 자비로운 사랑은 절대로 일방 적인 행위나 과정일 수 없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반드시 수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에서 '행동에로의 부름'을 발견하고 자비를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입고 체험한 사람은 더욱더 남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나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으로써 이를 잘 증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사랑을 베푸시어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 주셨듯이, 자비로운 사랑은 안보이는 하느님을 체험케 하는 길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그리고 교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부터 자비로운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친구들 사이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비로운 사랑이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부님들께서는 교회 직원들에게, 수도자들에게, 교우들에게, 교회와 이웃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신부님들이 교우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하고 가정에서는 가장들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25) 말씀이라든가 잘못한 형제에게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2) 하심으로써 자비를 입은 사람이 얼마만큼 우리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들으려 노력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면서 아버지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바라볼 때,우리는 지금 시기적으로는 대희년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으며, 제 '삼천년기'로 출발하려 하고 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요구 시노두스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눔운동
수원교구를 포함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활발한 교회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시아 주교 시노드를 다녀오신 주교님들의 말씀과 아시아 주교 시노드 보고서를 통해서 볼 때, 아시아 주변국들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이 좋은 위상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우리 교회의 현상황을 잘 깨닫고 지금의 이 상황이 우리 순교 선조들이 피흘려 준비하셨고 고대하시고 갈망하셨던 그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피흘려 준비하셨기 때문에 신앙의 후손으로 거저 얻은 이 좋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야 한다는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카이로스적 중요한 기회의 시기에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가장 기본적이요 일상적이 일인 본당 분할작업과 선교활동 그리고 새복음화와 사회복음화를 꾸준히 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범민족적인 차원으로 볼 때 통일사목이야말로 한국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일로서 가장 절박하고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교회가 굶어 죽어가는 북한의 같은 핏줄에게 지속적인 식량지원으로 먹을 것을 나누고 통일을 이루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케 하는 일에 일조를 하는 일이야말로, 자비를 입은 교회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더없이 좋은 길일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통일사목에다가 중국의 선교까지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 교회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맞고 있는 또다른 카이로스적 숙제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해야하는 큰 과제가 IMF 극복입니다. IMF 극복에는 경제적인 극복차원과 정신적 극복차원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실직자들과 그 가정, 가족들을 교회가 힘껏 도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케 하는 것이 경제적 극복 차원입니다. 다른 한편 교회는 특히 IMF의 정신적 극복 차원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즉, 기술발전보다 인간다운 사회질서 확립이 더 값진 것 임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해 물질적인 절제, 복음적 가난을 교회가 실제로 살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이끌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점점더 심화될 빈부의 양극화 사회에서 교회가「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원칙을 잘 고수하고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그리고 여성과 깨진 가정들을 돌봄으로써 그들 모두가 교회로부터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듣고 보게 해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안에서 서로간의 나눔도 필요합니다. 수원교구는 도시본당과 농촌본당이 있고, 분당을 하는 본당과 신설본당, 건축을 하는 본당이 있는가 하면 복음화 활동에만 전념하면 되는 본당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기에 교구내에서 어려운 본당들에게 형제적 나눔의 생활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도시본당과 농촌본당이 서로돕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는 본당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에게 자비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천주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드러날 것이며, 이기적인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 교구민 모두가 나눔운동으로 북녘 동포와의 나눔, IMF 이웃과의 나눔, 그리고 본당간의 나눔, 특히 농촌본당과의 나눔이 잘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청소년 운동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져 간 우리 청소년 그룹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와 교회의 미래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공동체적이지 못하고 개인주의적이요, 이기주의적이며, 영생에 관심이 없고 현세주의적이며, 정신적, 영적이기 보다 물질주의적인 세속정신속에서만 살아간다면, 그들 자신에게 불행임은 말할 것도 없고 미래의 사회와 교회에도 희망이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청소년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여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께와 교회 공동체로 돌아와 기쁘게 살고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국가 사회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게하는 것 또한 우리 교회가 맡은 큰 시대적 사명 중 하나입니다.
청소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목적인 배려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주일학교 학생들의 재적률을 높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일학교에 적을 두지 않은 학생들은 곧바로 냉담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심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해 주고 자신들만의 대화장소와 문화시설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할 역할을 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자신들이 할 역할이 없으면 안 오게 마련입니다. 청년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교회에서 점차 주인이 되도록 일을 맡기며 뒤를 보아주는 배려와 지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원 교구민 모두는 청소년운동으로서 주일학교 재적률 높이기, 신심운동 프로그램 개발, 대화장소와 문화시설 제공, 역할주기 그리고 청년들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 펼쳐지기를 희망합니다.
수원 교구민 여러분, 1999년 "성부 아버지의 해"를 맞아 우리 모두가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합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는 데 동참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합시다. 2000년 대희년 마지막 준비를 잘 하도록 늘, 마음속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바칩시다.
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친애하는 수원교구민 여러분과 모든 가정, 그리고 교구내 모든 본당 공동체와 수도 공동체 및 여러 기관 공동체에 인사드리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은총과 평회를 가득히 내리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주 예그리스도 탄신 2000년이 되는 대희년을 준비하고있습니다. 탄신 2000 주년을 맞으시는 우리 주님께 보다 복음화된 세상을 선물로 드리기 위하여 1997년을 "성자의 해"(우리의 믿음·행복의 해)로 지냈고, 1998년을 "성령의 해"(우리의 힘이요 희망의 해)로 지내고자 합니다. 특히 1998년 한해 동안 성령께서 많은 구원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과 교회 전체가 도구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사목교서>를 여러분에게 보내드리오니, 모두가 이 교서를 공부히고 실천에 옮겨 성령의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성령으로 가득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되지 못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을 보고 듣고 있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드립니다.
여러분중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쇄신해 보고자 하시는 분들과, 우리 사회가 당면한 어두운 그림자와 죄악들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으로 새 세상이 되기를 간적히 바라시는 분들온 이 교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셨고(창세 1장) 세상을 구우너하실 때에도 사람이 되신 말씀(=성자)을 통하여(요한 1,14) 성령의 힘으로(루가 1,35; 4,14 과 사도행전)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구원을 위해 당신아들(=성자 예수 그리스도)을 세상에 파견 하셨고 당신 성령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구약시대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해준 구원시기인 메시아 시대의 특징적인 점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오게 될 새시대, 즉 새하늘과 새땅(이사 65장;66장)으로서, 이는 마른 뼈들과 같은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영인 숨을 불어넣어 주어(에제 37장) 그들이 하느님과 맺게되는 새계약(예레 31,31)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이 누구이시고 어떤 역할을 하시는 분이신지를 알고,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삶과 활동을 묵상해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년 간 제자수업을 받고있던 열 두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제자이긴 하였으나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전파자가 되기에는 즉,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그분의 복음화사업을 이어가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자리다툼(마르 9,33-34)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한 인간적 거부(마르 8,31-38), 스승이신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도망간 일(마르 14,5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도 그 때 뿐이어서 부활하신 분이 사라지면 불안해 하고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사실들이 이 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다음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그들의 오금이 펴졌고 입이 열렸던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살아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들의 가슴은 주 그리스도께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라 문을 박차고 나가 군중앞에 나타나 대담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시라는 것과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되었다(사도 2,14이하; 4,20). 사도들의 정신과 삶이 이와같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 었다.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혼, 얼을 받은 그들은 이렇게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전파만을 위해 살기로 함으로써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들의 이기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생각과 생활을 벗어버리는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되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제자들은 그때부터 예수님이 하시던 하느님나라 건설을 이어 받아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봉사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즉, 사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자께서는 인간으로 오실 때에 예수님 한 분 안에 오셨지만 성령께서는 성모님과 제자들에게 즉, 동시에 여러 사람들 안에 은총으로, 내재하시는 힘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나라 완성이라는 공동이익과 목표를 위해 봉사하고 서로 일치하게 하신다. 성령은 하느님의 혼, 얼, 정신으로서 하느님의 힘을, 활력을(power, dynamic) 주시는 분이시고 성령을 받는 분들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에 대한 열정과 자기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열정과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성령의 이 힘은 사도들 안에서도 나타났다.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도록 되어 있는 바로 이 점이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와 달리 사도들의 안수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세례의 특징으로 나타난다(사도 1,5; 11,16). 우리는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는다. 그 성령을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8,15)"라 부르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 등의 내적 열매를 맺게되고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힘과 은사적 선물(I고린 12,4-11) 등의 외적능력들을 받는다.
카리스마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능력과 재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끌리고 강해져서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여지는 것을 말한다. 카리스마 즉,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즉,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I고린 12,7) 주어졌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도록 이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항상 새롭게 '예'라고 대답하고 사도들처럼 다른 이들의 구원에 일조하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을 성령쇄신이라 한다. 수에넨스 추기경님은 성령쇄신의 이 점을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다. "성령쇄신의 가장 큰 힘은 복음화 작업의 분야에 있다. 성령의 능력의 체험을 통한 예수님과의 개인적(개인주의적 의미가 아닌) 관계의 회복은, 성령쇄신에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능력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안에 신앙을 일깨워 주며, 그 신앙을 개화시켜 성장하도록 촉진시켜주는 기초로서 의식하게 해 주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변화(metanoia) 한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인식에 도달하도록 인도하고 또 자신도 인도 받는다는 뜻이다. 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미구에 예수께서 아버지께 넘겨주실 그 나라를 갈망한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령의 복음화 역할을 두고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이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이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 적은 없지만 교회사를 통해 볼때 우리가 성령을 잊고 산 적도 있었고, 현재 신앙인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중에도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와는 아주 다른 열매를 맺는 데서 성령을 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교회생활과 개인 신앙생활에 생동감과 활동이 없고, 기쁨,감사,평화가 없으며, 이웃사랑 실천과 전교활동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무미건조하고, 짐스럽게 받아들여지고,의무감으로 느껴져 기쁘지도 감사하지도 않고, 신앙생활이 살아가는 데에 아무 도움도 주지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은 교세성장의 둔화, 영성적 활기의 부족, 교회의 세속화, 신앙의 이기주의, '믿음 따로, 삶따로' 등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은폐시켜가며 살고, 신자가정에서 자녀들의 세례를 기피하고 주일미사와 판공성사를 궐하여 냉담자로 변해가고, 소공동체 생활을 부담스러워하고 천주교 신자의 양심으로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며, 급기야는 하느님과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성령을 망각하고 의식하지 못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받지 못함으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안타까운 현상들이다. 성령을 잊게되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단지 인간적인, 박애정신에만 뿌리를 둔 신앙생활로 변질되고, 순 사회적이고 자기수양이나 사회구제 단체로서의 교회생활로 전락하고 만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말씀대로 성령은 교회의 혼이요 세말까지 교회를 교회이게 해 주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신데,그분을 망각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마치 혼빠진 육신 또는 정신나간 사람과 같은 그런 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잘못된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나" 또는 "우리"중심적 이기주의로부터 이웃의 구원과 공동체 이익에로 해방시켜야 한다. 즉, 성령을 받아 성령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움직이는 신자들과 교회가 되어(봉사생활과 전교생활로써)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하여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고 신앙인들로 바뀌어야 한다(기도 및 성사생활과 공동체생활로써).
성령의 활동과 은사의 열매들은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영이시기에 볼 수 없는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봉사의 모습으로 역사 안에서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나라 완성과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때 비로소 성령의 소망을 채워드리는 것이요 성령께 충실하는 것이며 성령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세상구원 사업을 위한 하느님의 동업자들이 되는 것 이다.
이와 같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동감 있고 살아 움직이는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구성원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고 하였따. 이 참여는 교회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성령으로 충만함)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해진다는 말이며 그분의 말씀안에 의탁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요한 15,1-8),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흐르듯 하는 풍성한 삶(요한 7,38-39)을 뜻하며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을(루가 12,49) 의미하고,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것을 체험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하여
① 모든 죄(범한 죄와 소홀히 한 죄)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② 성령이 누구이시며 왜 오셨고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찾지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무한한 영적 보고를 활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영적인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골로2,9-11). 한마디로 말해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주도가 아니라 인간 주도의 신앙생활을 하려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③ 하느님을 겁내지 말고 신뢰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 이시기에(요한 3,16; 로마 5,8) 겁내지 말아야 한다(I요한 4,18). 하느님이 우리의 계획을 바꿀까봐,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나 않을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든 재미를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성자를 보내주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믿어야 한다.
④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기도하실 때 성령이 오셨고(루가 3,22), 제자들도 기도할때(사도 1,14; 8,15이하; 13,3; 루가11,13) 성령이 임하셨다.
⑤ 성서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 3,2)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난 사람들입니다."(Ⅰ베드로 1,23)
⑥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와 헌신을 해야 한다.
①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내맡기는 삶을 살게되고,
②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넘치는 감격과 사랑을 가지게 되고, 무미건조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기복적, 한풀이식 기도에서 찬미와 감사, 자비와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는 기도로 변하고,
③ 이웃을 향한 깊은 관심과 배려를 지니며, 전교에 대한 열의와 대담성을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힘과 생명과 활력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면 성령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 안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① 신앙생활을 짐으로, 의무감에서 하지 않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 삶의 길로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
②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③ 성서 읽기를 좋아한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데 맛들인다.
④ 전교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체험하고 있기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⑤ 사랑실천에 강한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이웃사랑 실천에 솔선하고 특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때로는 지속적으로 돌보며 봉사한다.
⑥ 교회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이다.
우리 신앙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모두 이런 사람들로 볂화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그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다(루가 11,11-13)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 하며(마태 28,20),
②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로마 12,1-2),
③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인도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되게 해 주시도록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에페 6,18; Ⅰ사무 12,23),
④ 하느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며(히브 4,12; 사도 17,11; 시편 119,11),
⑤ 성령을 슬프게 하거나(에페 4,30)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고(Ⅰ데살 5,19),
⑥ 항상 성령을 갈망하고(야고 4,5),
⑦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로마 12,1-2).
한마디로 말하자면, 죄의 생활을 버리고 내가 하느님과 이웃을 오롯하게 섬기는 생활을 늘 새롭게 하여야 한다.
수원교구 형제 자매 여러분, 1998년 "성령의 해"를 맞아 성령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성령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앞으로는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활기 있고 생동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이는 삶이 되어, 우리 자신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가 알차게 이루어지고, 하느님나라가 완성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탄신 2000돐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아직도 복음화가 시작단계에 불과한 아시아 대륙의 한편에 있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복음화부터 시작하여 한수이남 경기도민의 복음화 그리고 북한선교 더 나아가 중국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살인, 강도, 마약 등 강력범죄와 생명경시풍조, 환경파괴, 부정부패, 윤리도덕의 상실, 가정파괴, 청소년문제 등 사회 전체가 침몰하는 것을 막고 인간성을 회복하여 '새하늘 새땅'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새로운 창조의 주역이신 성령을 반드시 힘입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우리 믿는 이들 자신부터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빛을 따라 살아가신 동정성모 마리아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순교선열들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늘 성령을 모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ㅇ이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대희년을 알차게 준비하는 일인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꼭 오셔야 합니다. 이같은 새 성령강림이야 말로 오늘의 우리 교회와 세상의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세상의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하여 늘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