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20-26
행복의 관건은 ‘누구를 위해 가난해질 것이냐?’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아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굶주리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봉헌’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봉헌될 때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이 채워지며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많은 이들을 자신 안으로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과 쾌락을 구분해야 합니다. 쾌락은 가지는 것, 먹는 것, 세지는 것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적응됩니다.
이를 쾌락 적응이라 합니다.
UC 리버사이드 심리학과 교수 소냐 브로머스키는 복권에 당첨되든, 직장에서 승진하든, 결혼을 하든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온다고 많은 사례를 통해 주장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큰 쾌락, 혹은 중독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까지 빠져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묻습니다.
“물이 뭐예요?”
물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행복 자체에 있으면 적응됩니다.
전혀 행복한 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운동의 고통을 즐길 수 있고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은 배고픔을 참을 줄도 압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통도 즐길 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모른다면 사실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치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난과 배고픔, 멸시받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황제가 하사했다는 사케를 한 잔씩 하고 죽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봉헌하지만, 결과는 자기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성전이나 병원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회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해 가난해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은 인간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든 타인을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부모와 같은 창조자를 위한 가난과 자기 봉헌만이 두려움 없이 나를 내어줄 수 있게 합니다.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요셉 병원 선우경식 원장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노숙인들의 무료 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73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저명한 대학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한국에 돌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져도 꿰매 신고, 차가 다 낡아서 사람들이 선물해 준다고 해도 의료품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우 원당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 때 요셉 의원 현관접수를 맡고 있던 안수근 씨가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신림동 다리 밑에서 살면서 술과 싸움을 일삼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재활시키고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안 씨는 “제 소원은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는 것인데 살아 계실 때 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젠 저 속 안 썩이며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한 이들이었고
정말 가난하고 배고프고 멸시받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주기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더 먹이기 위해 배고파져야 하며 높이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길 오두막처럼 여기다가 이제는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 자존감이 행복의 수준입니다.
이 행복을 아는 이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자선하고 단식하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그 뒤에 올 행복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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