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안토니 가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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