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굴리트).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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