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달라이 라마).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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