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5,31-46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가 받게 될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은 함께 살 부류끼리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 것들의 차이는 바로 사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기와 인간을 묶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이요 심판관으로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여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었으며 병든 이를 찾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준이 선행의 행위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십계명을 잘 지키면 선행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어떤 아버지가 불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모른다면 그래도 뛰어들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체성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요,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는 한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져 자신과 같은 인간을 배신할 수 있다는
줄거리를 가집니다.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에 유혹받습니다.
칼렙은 에이바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네이든을 싫어합니다.
에이바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칼렙은 네이든을 배신하고 에이바를 풀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네이든은 에이바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만약 아기와 개, 두 대상 중에 자신과 평생 살 대상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주님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심판하십니다. 칼렙처럼 행동만으로 심판하려다가는 사람처럼 똑똑한 개를 선택하고 아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달려오는데 여러분의 반려동물과 한 범죄자가 그 차에 치이기 직전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여러분이 어느 무리와 살 자격이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모든 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형욱 조련사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까요? 같은 인간끼리는 같은 욕망을 추구하여 ‘경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는 잘만 조련하면 모두 좋은 개를 만들 수 있어 모든 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더 높은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라고 하십니다.
이때문에 아기가 동료 아기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애벌레끼리는 경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모든 애벌레 안에서 나비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애벌레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모든 인간을 자비의 눈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게 됩니다.
야곱에 이사악 앞에서 자신이 에사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체성의 변화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5항)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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