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주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늘 침착함을 유지하십니다. 우리는 욕지거리를 들으면 침착을 쉽게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늘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상대의 화에 화로 마주하려 하고, 상대의 부정적인 말에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는 우리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래야 세상 안에서 잘 사는 것처럼 또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침묵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화를 내지 않는 저의 친구가 있습니다.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화 안 나?”
친구는 자기도 사람인데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냐면서, 대신 이것을 꼭 기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장에서 생각 중이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어도 가만히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듯이, 그 시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일까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쫓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히 안고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면서, 점차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입장에 서서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위로는 위로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위로받는 자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이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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