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이 노인에게 삶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청년에게 양동이 3개를 준비한 뒤 물을 넣고 끓이라고 시켰습니다.
물일 끓기 시작하자 노인은 청년에게 한 양동이에는 당근을, 다른 양동이에는 달걀을, 마지막 양동이에는 찻잎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노인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끓는 시간은 곧 삶에서 겪는 고난의 순간들이라네. 세 가지 대상에게 고난이 주어졌더니, 어떤 결과가 펼쳐졌는지 보게나.”
물이 끓을수록 당근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달걀은 속이 단단해졌습니다. 찻잎은 물 전체를 향기로운 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근에게, 달걀에게, 찻잎에게 뜨거운 물은 분명히 고통이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실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부드러워질 수도 또 단단해질 수도 그 결과 향기로움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지요. 그 결과 고통과 시련은 무조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 안에서 축복의 통로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은총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에서 방해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병을 앓고 있음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서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막는 사람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기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규정을 짓습니다. 그런 섣부른 판단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없애고, 그곳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결코 죄의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해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클라이브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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