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때, 동아리 MT로 전라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광주신학교 신학생들을 만나서 모임을 하고,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했지요. 이 자리에서 안주로 ‘홍어’라는 것을 처음 접했습니다. 심한 암모니아 냄새와 함께 코가 뻥 뚫리는 체험을 했지요. 이 이상한 음식을 왜 먹나 싶었습니다.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먹어야 하냐고 물었지요. 하지만 그곳 신학생들은 계속 먹다 보면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 된다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30년 전에 시작했던 홍어와의 만남이 지금은 어떨까요?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피 음식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홍어가 나오면 입맛이 돋고 술맛도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홍어의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미사를 처음부터 기쁨과 행복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군대에 있을 때, 성당 가면 맛있는 간식 준다고 꼬셔서 함께 미사에 갔던 동료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당의 미사는 너무 힘들어. 계속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니, 편안히 잠잘 수 있어야 말이지. 그런 면에서 불교가 최고야.”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기쁨은 이 고통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진짜 맛을 느끼는 상태까지 와야만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쯤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상당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모님의 승천이지요.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이며 영광입니까? 그러나 이 영광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얻은 것도, 또 운이 좋아서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계속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 고통의 크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모님께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낳을 장소가 없어서 허름한 마구간을 선택했던 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또 산후조리도 못 한 채 이집트로 피신까지도 가야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성전에서 잃어버리기도 했고, 세상에 나간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것도 부족했는지 이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도 직접 봐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넘어섰기에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성모승천이라는 영광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작은 고통과 시련에도 크게 넘어져서 주님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