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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09 조회수 : 1665

믿음이 사람을 정화하는 방식: “지금 죽어도 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더럽혀지는지 말씀하십니다.
더럽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살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 깨끗한데 혼자만 더러우면 차라리 지옥이 편해서 스스로 지옥을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정화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방식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든, 어떤 소리를 듣든, 어떤 오물에 더럽혀지든 그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마음에서 왜 이런 더러운 것들이 나올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게임과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돈에 집착하는 이유도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집착하는 이유도, 또 누군가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불안은 어디서 올까요? ‘생존하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생존하려는 마음이 탐욕, 성욕, 명예욕을 자극하여 사람을 더럽힙니다. 
따라서 생존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더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봅시다. 
대부분은 죽기 직전에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나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생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욕망이 사그라든 것입니다.
모든 욕망은 나의 육체가 내일도 산다는 가정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죽는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뭐할 것이고, 자녀를 낳으면 뭐할 것이며, 대통령이 되면 뭐할 것입니까?
우리가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죽음 앞에서도 불안합니다. 
죽음 뒤에 심판이 있음을 직감하고, 또는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기 전에도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형수들은 일부러 어린이처럼 보폭을 좁게 하여 늦게 걷는다고 합니다.
또 일부러 신발을 흘려서 다시 뒤로 돌아 신발을 신으려 합니다. 
그 잠깐이라도 더 살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 직전에도 죽지 않으려 하면 깨끗해질 기회를 잃습니다.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책에 이런 내용을 다 썼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본 것이라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박 장로가 본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형수의 대표자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공직자로 있다가 퇴직해서 돈이 없고 막장으로 밀리니 자기 먼 친척을 생명보험에 가입시켜놓고
그 보험을 자기가 타 먹도록 계약을 해놓고 그 집을 불태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으며 힌두교에 몰입하였습니다. 
그러다 조로아스터교까지 받아들여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불교 경전, 힌두교 경전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으로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90일 동안 눕지도 않고 벽만 보고 좌선하며 많은 죄수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영치금도 모아놓았다고 죄수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교도관들도 그 사람 앞에서 작아질 정도로 큰 성덕을 보여, 교도소 소장 못지않을 정도의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형받는 날이 되자 상황이 급변하였습니다.
사형장 계단을 오르지 못하여 교도관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질질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밧줄을 보자 ‘헉’ 하며 오줌을 쌌습니다. 이름을 대라니까 이름을 대고, 주소와 본적을 대라니까 고개를 숙여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으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본적을 대라니까 머리를 들고 쌍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날 죽이고 너희들이 잘되나 보자.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은 죽음을 초월했을 것 같이 보였던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절차를 진행할 수 없자 소장은 바로 사형을 집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어떤 신도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성체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분만을 참 구원자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활이요 생명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나는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당장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성체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따듯한 밥을 먹으며 생존의 걱정을 내려놓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그 따듯한 사랑으로 나의 생존문제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박효진 장로가 정말 놀란 두 사형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한 사형수는 윤도형이란 사형수입니다. 
사람도 많이 죽였고 악질인 망가진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박 장로는 일부러 “야, 너 죽을 준비됐나? 죽을 준비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화내지 말라. 나도 사형수야. 그러니까 우리 모두 죽을 준비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윤도형은 조금씩 주님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윤도형이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느냐고 했더니 주님께서 자신을 꼭 껴안고 계신 것이 느껴져서 정말 감사해서 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냥 자기 생각일 것이라 여겼지만 막 신앙을 가지려 할 때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교리를 배웠으면 좋았겠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박 장로는 윤도형을 데리고 오라고 신앙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오면서 찬송가를 불러주라 한 것입니다.
정말 지하에서부터 계단으로 올라오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란 소리가 들립니다. 
그 할렐루야가 윤도형이 하는 것입니다.
밧줄 앞에서도 편안하고 할렐루야를 하는 그 모습에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습니다. 부끄러워서입니다.
죄에 대해서 읽어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는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소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 죄를 지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느님을 알기 전에 지었던 죄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었다면 그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저 때문에 많으신 분들에게 고통을 드렸지만, 주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가는데 그 더러운 죄를 마지막으로 다시 듣고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발 그 죄를 읽지 말아 주십시오.”
소장님도 이 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윤도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저런 고백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에 밧줄을 매고도 그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갔습니다.  
 
어느 여성 사형수도 그러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시어머니까지 죽이려던 악랄한 사형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믿음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 찬송을 부르며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녀는 또박또박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마지막 변론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셔서 두 번 다시 저와 같은 악한 죄인도 사라지고 오늘 같은 무서운 형벌도 사라지도록 하느님 나라에 가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아버지 죽고 나마저 땅을 떠나고 나면 남겨진 남매들은 이 땅의 천애의 고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이렇게 거두신 하느님께서 내 어린 남매들을 누구보다 잘 키워주실 줄 믿고 안심하고 천국으로 갑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다면 오늘 당장 정화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을 기쁘게 마지막 날로 삶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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