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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10 조회수 : 1518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믿음이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섞여 사는 접경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려고 하셨으나, 그분이 오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딸의 치유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나라인 유대인들에게도 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는데 이방인이 와서 청하니 순서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그러자 그녀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희망의 크기를 보시고 유대인들에게도 충분히 주지 못하신 치유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믿고 원하기만 한다면 이방 신을 믿는 사람에게라도 언제든 당신 은총을 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이 이방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분명 자신이 믿는 신들에게 악령을 쫓아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 되니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에겐 출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희망에서 나옵니다.
완전히 행복해지려는 희망은 한 사람을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3,000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여 화장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탈출할 수 없어지자 유대인들은 낙망하여 무기력하게 자기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레히’라는 사람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다들 총살된 거 보면 몰라? 우리에게 희망은 없어.”
하지만 레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니다. 
분명히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답은 찾으면 보입니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시체가 트럭으로 던져지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레리는 이 광경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레리는 일과가 끝나고 작업자들이 막사로 돌아갈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트럭으로 올라가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시체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시체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차갑게 굳은 시체들이 몸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트럭이 출발하여 덜컹거리며 수용소 담장 밖으로 나가서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 안으로 시체들을 쏟아부었습니다.
레히는 밤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시쳇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알몸으로 40㎞를 달린 끝에 나치의 만행이 없는 자유의 땅에서 빛나는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마빈 토케이어, 함께북스] 
 
레히는 어떻게 남들이 절망할 때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기를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절망에 속하지 않고 희망이 있음을 믿고 싶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할 때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믿지 않아서 좋은 건 뭔데?’
우리는 믿음이 증거가 있어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믿음과 희망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그대로 멈추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분명히 있음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도대체 믿지 않으면 뭐가 좋을까요?  
 
한 봉쇄 수도원에 무신론자가 왔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만약 신이 없다면 당신들이 하는 고생은 다 헛수고가 될 것이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도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공동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느님이 안 계셔도 이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산 것에 대해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의 행복을 선택했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지도 희망하지도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참으로 행복합니까?  
 
믿지 않으면 그저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모시며 허무함만 남기는 탐욕과 쾌락과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는 집착의 삶만 남습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생존하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살다가 하느님이 계시면 정말 후회할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도대체 믿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도 않는 삶이 뭐가 좋아서 선택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편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단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망하든지 절망하든지.  
 
어느 유명 박물관 벽면에 사람과 악마가 장기를 두고 있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 한 폭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악마가 사람을 상대로 ‘체크’(장기에서 ‘장군!’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체스게임 용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장군’을 외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리고 또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젊은이는 펄쩍펄쩍 뛰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박물관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되었기에 경비원들이 그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젊은이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또 큰 소리로 “이건 거짓말이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또 쫓겨났습니다. 
이제는 아예 경비원이 그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그가 박물관 문 앞에서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짓말이야! 저 그림은 거짓이야. 끝장이 아니라 희망은 남아 있어. 아직 한 수가 남아 있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그 그림 앞으로 가서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았습니다.
얼핏 악마가 인간을 완전히 이긴 것으로 보이나 그 젊은이에게는 완전한 ‘체크’(장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내가 죽지 않는 한, 내가 포기하기로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저 양자택일일 뿐이고 내가 그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그 증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 정 중앙에는 인간에게 한 수를 알려주기 위해 안타깝게 훈수를 두려 하는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악마는 그냥 체념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증거를 따름이 아니라 나의 선택입니다.  
 
사형 집행 때 믿는 사람은 100% 행복하게 죽음으로 나아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버둥 친다고 합니다. 
믿지 말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좋아요. 그런데 안 믿어서 좋은 건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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