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같은데 관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예수님의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비유의 뜻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바깥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이유가 비유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시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이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할 때 약간씩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사가들의 개인적인 구원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네 명이 믿음을 가지고 청하니 한 명의 병과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 마르코 복음에서는 공동체가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푸리아누스 성인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에서 열두 사도는 공동체 안에 든 교회의 백성을 상징하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는 비유는 그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한 초대장이 됩니다. 초대장만 받았다고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다가와 그분의 공동체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듯이 이 세상에서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구별하여 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마치 원 중심 안에 당신이 계시고 조금씩 멀어지면서 조금씩 더 차별하여 대하시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100배, 조금 먼 사람은 60배, 조금 더 먼 사람은 3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조금 더 밖에 머무는 사람은 아직 세상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여 열매를 맺으려다가 멈춰버립니다. 더 밖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때만 번뜩했다가 이내 시들어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도 세 부류가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 부류로 나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얼마나 더 밀접한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론 예수님께 겉으로는 가까이 있더라도 가리옷 유다처럼 본인이 거부하면 사실상은 가장 밖에 있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비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어떻게 구원받는 공동체에 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상담을 받기 위해 와서는 “아내가 많이 혼나고 반성하고 오라네요.”라고 머리를 긁적입니다.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도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이유는 너무 예쁜 아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누가 봐도 예쁜 외모를 지녔는데, 얼굴만큼이나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니 남편의 마음엔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말이 잘 통하는 여성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입니다. 상담사는 “아내 핑계 대지 마세요. 가장 큰 잘못은 당신이 했어요.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고 바람을 피우는 게 잘하는 짓인가요?”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며칠 뒤 그 남자는 아내와 함께 상담실을 방문했습니다. 아내는 “바람이요? 그냥 사고죠. 어떻게 저 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담사가 남편이 마음으로 멀어졌다는 것을 말해주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예쁘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 줄 거라고 믿었어요.”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담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도 관심을 두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죠.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결국은 다 외로워져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참조: 『불행한 관계 걷어차기』, 장정숙, 스몰빅라이프]
바람피운 남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부부는 사랑이 오가는 관계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아내의 외모가 오기를 바랐고, 아내 역시 자신의 외모만 가꾸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밭에 뿌리시는 것은 사랑의 씨입니다. 그 씨를 받아 사랑으로 돌려주는 사람이라야 그분과 가까운 공동체에 들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그분의 뜻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즉 미사 참례나 봉헌, 혹은 봉사, 기도 등만 돌려드리면 끝나는 줄 안다면 오산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미사 참례나 봉헌 등도 사랑 없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바치는 수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아무 조건 없이 그분의 뜻만을 따라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이 예수님 공동체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그만큼 당신과 가까운 공동체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합당하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1명, 2명, 12명, 72명 순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셨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그분의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그만큼 큰 진리와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이 차별은 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에 기인합니다. 그러니 차별이 아니고 정의입니다. 이 세상에서 꽝이 그렇게나 많은 로또나 도박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분께 나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고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 그분께 조금 더 다가가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더 가까이 사는 공동체에 속하도록 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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