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만 할 것인가, 살 것인가?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제자들인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에게 편지를 씁니다. 사목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열정을 식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인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로 격려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의 은사는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불’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받아도 내가 노력해서 불태우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불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열정에 기름 붓기’란 말이 있듯, 우리 안에 열정이 들어와야 하고 그 열정이 들어왔다면 계속 기름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어디론가 나아가는 ‘항해’가 아니라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물 위에 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표류’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항해하는 인생은 인생을 사는 것이고, 표류하는 인생은 적어도 성취감이란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주식 투자를 해서 1년에 9억을 벌었다는 ‘채사장’이란 분이 ‘어쩌다 어른’에 나와 다시 한번 강의하였습니다. 말도 참 잘하고 확실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답게 자신감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고3까지 꾸준히 학교 등수가 하위 3%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삶의 열정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3이 되자 친구들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채사장은 여전히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마음으로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태어나서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책 한 권은 읽자는 마음으로 누나의 방에 들어갔더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책으로 적당히 두껍고 유명한 책이라 괜찮다 여기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보름을 읽은 다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멍하니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생을 비관하던 한 가난한 대학 청년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파를 죽이고 재산을 털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죽어 마땅한 전당포 노파였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끊임없는 양심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몸을 파는 나이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그 소녀는 하루라도 몸을 팔지 않으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어서 매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주인공은 그 소녀 앞에서 자신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낍니다. 소녀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지만, 자신은 자신을 위해 남을 죽였습니다. 주인공은 소녀의 청을 받아들여 자수하고 시베리아에 벌을 받으러 가며 책은 끝납니다.
아마 채사장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고 130만 부를 판매한 인기도서 작가가 되고 주식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하며 세네카의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채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열정은 『죄와 벌』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삶,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 중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위해 기름을 쏟아부었습니다. 대학 들어가서 1000권의 책을 더 읽은 것입니다.
지금은 『죄와 벌』을 읽고 삶의 방향을 정한 것 때문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표류한 것이 아니라 항해를 한 것이고 생존한 것이 아니라 삶을 산 것이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를 만난 티모테오와 티토도 그렇게 바오로를 통해 열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그 열정을 꺼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은총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 기름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열정에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열정은 태울 게 없어 꺼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도 계시겠고 아니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실 분도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늙는 것 생존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낸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 맨손으로 롯데타워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암벽을 손가락 한 마디만 이용해 오른 알렉스 호놀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사실 대학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자퇴하고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무려 9년 동안 준비한 끝에 로프 없이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절벽을 오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내고 그 덕분으로 결혼을 하고 지금은 강연자로 활동 중입니다. 아무리 열정이 생기더라도 그 열정을 위해 50번 넘게 로프로 오르며 나 자신을 그 열정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그 열정은 결국 꺼져버렸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각자의 마음에 분명 열정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올라야 할 산이 있고 지금은 힘들더라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나 자신을 쏟아붓다 보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을 때 내가 오른 곳에서 위에만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택권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오르든지 구경하든지. 주님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열정에 기름을 붓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남을 해치며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며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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