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동체든 각자가 가진 진리의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빛’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이 구원의 진리가 없었다면 중풍 병자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진리는 분명 죄의 용서로 이끄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진리를 찾으려고만 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신 구원의 진리를 감추시지 않고 원하는 누구에게나 알려주십니다.
다만 ‘공동체’에 묶여 있는 것이 이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공동체는 유리벽이 있어서 그 진리의 빛이 통과하는 양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천지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이만희 총재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하도 많이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이만희 씨가 강대상에서 똥을 싸고 내려와도 사람들은 그 엄청난 진리를 주제로 토론하고 무언가 깨우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은 개신교에 있다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와 같은 진리를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그 진리를 믿는 즉시 공동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와 멀수록 빛을 감소하게 만듭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33세에 최연소 광주지역 노회장(천주교로 치면 주교님과 비슷한 위치)이 되었다가 지금은 천주교로 개종한 김재중 요셉 형제가 있습니다. 그분이 노회장을 할 때는 죽었던 사람까지 되살아날 정도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봉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천주교를 마리아 숭배교라 부르며 싫어했습니다. 성당에 성모상이 있는 것은 마치 성전에 바알 우상이 세워진 것처럼 끔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그러던 중 병이 들어 잠시 노회장 일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때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성모송을 듣고는 그만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던 성모님을 향한 천주교의 그 짧은 기도 안에 삼위일체 신비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성모송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도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 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삼위일체 신비를 공부하던 중이라 당연히 ‘은총’은 인간의 죄로 끊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그 은총이 가득하다고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지만 성모님이 그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계신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확실한 증거지만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는 이 진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도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하셨으니 자신이 그렇게 저주하고 돌을 던지던 성모님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다 존재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신 성모님께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나니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개신교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받고 있던 모든 명예와 재물과 편안한 삶까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지원이 끊겼고 곧바로 실업자가 되었으며 이젠 개신교 신자들에게 미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에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며칠을 굶고 난 뒤 너무 허기가 져 남의 집 개밥을 훔쳐 먹다가 개에게 손을 물려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종에 성공하였고 파티마 성모의 푸른 군대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충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 가면 유리가 얇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리석을 얇게 잘라서 창문을 했더라도 일반 유리보다는 빛이 들어오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당 안은 컴컴합니다.
공동체는 이런 벽들로 둘러쳐진 집과 같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더 두꺼운 창문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진리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눈이 있어도 장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런 공동체에서 노력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바꾸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 씨는 아빠를 바꿔서 성공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입니다. 그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는 그의 두 아버지가 나옵니다. 친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항상 가난했고, 친구의 아버지는 배운 것이 없는데도 돈의 원리를 알아 부자였습니다. 그는 친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버리고 돈이 돈을 벌게 만들라는 친구 아버지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이런 책을 쓴 것입니다. 공동체마다 품고 있는 진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깨닫게 되는 구원의 진리의 정도도 달라집니다. 좋은 공동체를 가지면 더 좋은 진리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먼저 좋은 공동체를 갖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반드시 그 공동체에 속해야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여러 작은 공동체들이 있고 그 공동체가 품고 있는 진리의 양이 각기 다릅니다. 내가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 잘 살피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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