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4,15-24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을 초대한 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부자이기에 특별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이 그들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식탁에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었지만,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밭을 샀다고, 어떤 이들은 소들을 사서, 또 어떤 이들은 결혼했기 때문에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세상 것들이 하느님 혼인 잔치 초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길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 눈먼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면 모두 데려와 잔칫상이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세상 것들이 자신을 더 영광스럽게 해 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많은 실망’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생무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힘에 의지하지 못하게 되고 주님 초대에 ‘감히 내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30세 초반에 엄청난 영토를 정복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만큼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인생무상을 깨달았고 그래서 가장 비천한 이들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로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 번의 눈물로 익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익어가야 합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시아 원정을 하였을 때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 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너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고 지친 부하들도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정복만 하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쓰러뜨린 부하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나 자신을 쓰러뜨린 사람이나 다 한 무덤만 남기는 그런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깨지며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작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세상 모든 것들이 허무하여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낄 때 비로소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주님께서 나도 그렇게 초대하고 계심이 보이게 됩니다.
저는 저의 대학 친구들을 계속 만나며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봅니다.
처음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사업을 하여 사회에서 잘 나가고 멋진 아내를 얻는 모습에 의기양양했습니다.
이때는 서로 바빠서 친구를 찾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 넘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업의 한계를 느끼고 명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고 배우자와의 사이가 벌어지자 우리 친구들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겸손해지자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이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안에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녀들이 그들처럼 뛰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이 자녀에게도 실망하여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난한 사람도 보이게 되고 하느님도 찾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배에 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자신들을 크게 만들어줄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것들을 지푸라기처럼 여겼습니다.
어차피 홍수 한 번이면 다 쓸려버리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품을 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또 그런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더 많이 깨져서 더 겸손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도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가난하고 다리를 절며 눈이 먼 장애인 중의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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