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복음: 마태오 5,1-12ㄴ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집니다.
전대사를 받으면 연옥의 모든 잠벌을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부족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간 이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는 너를 안다”라고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을 만났더라도 주님께서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들으면 큰일일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죽음을 잘 준비한 이들을 기념하며
우리 또한 그 대열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에이미 커디’는 이런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사고로 인한 지능 저하로 남들보다 4년 늦게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교수직을 따기 위해 지도교수와 여러 중소 규모의 콘퍼런스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함께 모이는데 박사과정에 있는 이들은 이 교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합니다.
이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함께 탄 교수에게 약 90초 동안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것을 핵심적으로 쏟아내어 그 교수가 자신을 채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몇 년 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이런 콘퍼런스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에이미 커디도 단단히 준비하고 중소도시 평범한 콘퍼런스에 지도교수와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개회 만찬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 명의 거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세 명의 스타 교수들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멍하였습니다.
이때 한 교수가 “아하,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네요. 연설 한 번 들어볼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에이미 커디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의 별과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초긴장한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 저, 잠깐만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
에이미는 말하면서도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 번도 잡기 힘든 기회를 세 번이나 동시에 날려버리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테니 그녀의 교수직은 물 건너간 것 같았습니다.
또 자신을 여기까지 믿고 데려온 지도교수를 볼 면목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세 스타 교수들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하는 아주 작은 표정만이라도
애타게 갈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고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두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내렸고 마지막 교수는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엘리베이터 스피치 중 최악이었네”라고 말하며 내렸습니다.
에이미는 그들과 함께 내리지 못했고 자궁 속 아기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4년 넘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어째서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게다가 실패하고 나서 안도감이라니?
그리고 왜 이제야 준비한 내용이 떠오르는가?’
그녀는 이 경험을 깊이 성찰하며 ‘프레즌스’라는 심리학 용어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즌스는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때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까?’를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미련한 처녀들은 분명 그렇게도 기다리던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이미 커디는 그때 ‘나는 세계의 유명한 스타 교수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지 그 교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교수들은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려면 ‘그들을 만나고 있는 나를 잊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 누군가를 만나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상대의 뜻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의 주인이 될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지배자로 두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을 위해 나는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챙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프레즌스’가 성취됩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걱정과 미래의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면 현재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온전히 만나려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이 프레즌스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잠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안다”라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프레즌스를 연습하는 방법은 짧은 기도를 통해 자주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주 짧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도 됩니다.
나의 의식을 나에게 두지 말고 주님의 뜻에만 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연습이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쉽게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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