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4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4,25-33
맛있는 사람, 맛없는 사람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처음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사서, 소를 사서, 결혼해서 등의 핑계를 대며 혼인 잔치 초대를 거부합니다.
결국, 이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려거든 모든 애정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는 물론이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은 자기를 버리는 과정입니다.
만약 자기를 버리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을 병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탑을 세우려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나, 혹은 싸움에 질 것이 뻔한데도
무작정 싸우러 나가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서 이 사람에겐 이 충고, 저 사람에겐 저 충고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의 표정은 “밥맛 없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말을 해 주는데 왜 밥맛이 없을까요?
사실 그들은 살아있는 나를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죽은 나를 먹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좋은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은 내가 죽어 맛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1992년 어느 봄날, 보스턴의 작은 교회에 많은 목사가 모였습니다.
보스턴의 청소년 살해가 부쩍 는 것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스턴 시내에서 한 해 73명의 청소년이 살해당했는데,
이는 3년 전에 비하여 두 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흑인 갱단이 서로 죽이는 보복의 살육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임은 별 소득이 없이 끝났습니다.
다만 갓 목사가 된 ‘제프리 브라운’과 몇몇은 밤에 돌아다니며 갱단과 대화를 해보는 방법을 택합니다.
수십 명의 목사로 출발했던 이 운동은 브라운 목사를 포함하여 단 네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갱단은 야밤에 자신들에게 설교하려고 돌아다니는 목사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꾸준함을 보며 그들도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처음엔 그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을 해 주려고 했지만,
목사들은 자신을 비우고 들어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갱단은 자신들에게 설교하지 않는 이 목사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브라운 목사는 그들의 말들을 들어보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부터 신년 행사가 열리는 1월 1일까지는 평화를 유지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싸움 좀 그만하십시오!”라고 제안했다면 그들은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그들의 귀에 솔깃했습니다.
“네, 추수감사절에서 1월 1일까지만 총질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갱단은 서로 이 제안을 따랐고 총질하지 않고 사는 그 한 달의 기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싸움은 보복 때문에 일어나는데 한 달이라도 보복이 일어나지 않으니 살인은 최저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례는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합니다.
갱단과 비슷한 나이인 이십 대 중반인 한 흑인 목사가 갱단에게 설교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이 원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이뤄낸 성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거름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던져 버린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비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맛있는 소금이 되고 양식이 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윌리엄 유리’라는 협상 전문가가 2003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만나기 위해 떠났습니다.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가 차베스의 하야를 요구했고 당장 내전이라도 터질듯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리가 차베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유리는 차베스를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제안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냥 들어주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차베스를 설득하기 위해 간 것이지만
그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주려 한 것입니다.
차베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유리는 듣고 그냥 갈 기세로 잘만 들어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보낸 줄 알았던 차베스는 유리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유리는 그때 작은 제안을 했고 차베스는 군중들의 의견도 수렴하겠다고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런 정책을 세우는 데는 불과 몇 분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알에이치케이]
욥이 원인 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세 명은 각자 자신이 아는 바대로 욥에게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친구들의 충고가 더 가슴 아팠습니다.
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다 아는 옳은 말만 할 때 더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 옳은 말은 상대를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을 버리면 맛있는 소금,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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