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42-46
율법 학자의 초대
어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초대받으신 것이
인격적인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그저 율법 조항처럼
머리로만 초대받으셨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증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초대받으시면 그 율법으로 우선 우리 죄가 드러나기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심판하고 질책하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하지 않고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을 자신 안에 초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을 들어 높이는 데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자 율법 학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타인들의 시선을 매우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거부했다가는 하와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인정보다는 사람의 인정을 더 추구한 것입니다.
만약 선악과를 주님께 바치는 것만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굳이 사람에게 더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강생하신 율법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을 지킬 때 그분이 미소 짓고 인정해주시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 안에 초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타인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선이 명확합니다.
자신을 죄짓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은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 안 그리스도의 평가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롤프 젤린’의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사람들에 대한 처세술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희생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데도
그들로부터 미움이나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두려워
과감하게 관계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병에 걸려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인정받지 못한 것을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이들을 집으로 비유하자면 담장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집과 같습니다.
어느 선까지 들어가야 주거침입죄로 걸리는지 도저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침입으로도 화를 내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당연히 주거침입죄로 신고해야 하는데도 당하고만 있습니다.
이런 삶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의 담장을 명확히 쌓아야 상대도 나를 대할 때 편하고 들어오려고 할 때 초인종을 누르게 됩니다.
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경계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관계에서 항상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롤프 젤린의 친구도 정신과 의사인데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말도 잘해서 TV에 출연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 인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으나,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우울증 걸리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상담을 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자니 유명해져서 교만해졌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나고 그들을 다 받아주자니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상담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외에는 절대 상담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나 결국 자신의 삶을 찾았고 다시 기쁨과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지쳐 쓰러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바로 다른 이로부터의 인정입니다.
이 인정받음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인정으로 높아집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면 사람들의 노예가 됩니다.
율법 학자들이 율법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의 시선에 노예가 되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짓누릅니다.
이는 아담이 비록 선악과는 따먹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했던 상태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옆에 계심을 인식했다면 굳이 하와의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선악과를 받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초대할 때,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처럼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동시에 그 율법을 지키는 이를 인정해주시기에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율법 학자를 넘어서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고 또 남의 심판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초대한 것이 맞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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