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연중 10주간 금요일]
코린토 2서 4,7-15
마태오 5,27-32
< 내가 죽는 것은 욕구가 죽는 것 >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제자 카이흔이 하루는 신에게
“신이시여!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신이 사제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은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튿날부터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자와 정치가와 예술가를 방문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생각에는 ... ”이라고 시작하며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신이 왜 자신에게 가장 지혜가 있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밟아보는 것입니다.
꿈들 거리면 산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았는데 째려보면 산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자는 자신을 온전히 죽일 줄 아는 자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척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덜 죽였다는 것이고 그만큼 미성숙했다는 뜻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길 때 진정 자신을 죽인 사람이고 그 안에서 신이 살게 됩니다.
신이 되려면 인간이 죽어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항상 내 몸을 짓누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내가 죽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어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려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려면 내가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어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행동만 죽으면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하느님 때문에 죽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동이 아니라 욕구가 죽어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주님의 기도에 따른 삶입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말은 자신 안에 그런 유혹의 욕구를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음욕을 품은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음욕이 생기지 않게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행위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만약 그렇게 하려면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죄 지을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 손발이 천 개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잘라버리는 것인데, 행동 위주로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은
결코 자신을 죽이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대신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욕망을 잘라버리면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아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욕구를 끊는다고 끊어질까?’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됩니다.
나비로 새로 태어났다면 애벌레 때의 욕구는 사라집니다.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유식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맛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면 죄의 욕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나면 됩니다.
은총과 진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는 노고를 해야 하는 것처럼 믿고 나아가다보면 이전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복음처럼 아내를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며 또 남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음욕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싸움이 대상이 욕구여야지 행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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