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연중 10주간 목요일]
코린토 2서 3,15─4,1.3-6
마태오 5,20ㄴ-26
< 의로움은 자비와 비례한다 >
2005년 11월 3일 요르단강 서안의 예닌에 살던 아흐메드 카티브(12)는 이슬람 축제일을 맞아 플라스틱 장난감 총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제 총을 가진 ‘무장 전사’로 오인한 이스라엘군이 카티브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소년은 머리와 배에 심한 총상을 입었고 곧바로 팔레스타인 지역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다시 이스라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틀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 이스마일은 “내 심장은 울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보다 중요한 희망이 있다.”며 아들의 장기를 이스라엘 아이들에게 떼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스마일은 수년전 자신의 동생이 간을 이식받지 못해 세상을 뜬 기억 때문에 이 같은 결심을 굳히고는 “팔레스타인 사람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AP통신에 따르면 소년 카티브의 심장과 폐와 간은 6일 이스라엘 소녀 3명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카티브의 심장은 같은 날 동갑내기 이스라엘 소녀 사마흐 가드번에게 전해졌고, 허파는 또 다른 14세 소녀에게, 간은 태어난 지 7달 된 아이에게 각각 이식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숨진 아들의 장기를 적국인 이스라엘에 기증하여 3명의 생명이 살아난 것입니다.
심장을 이식받은 동갑내기 소녀 사마 가드반의 아버지는 “카티브의 부모가 내 딸을 자신들의 딸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서 가드반의 퇴원 날짜에 맞춰 카티브 가족을 초청했습니다.
카티브의 아버지는 “간을 기증 받지 못해 죽은 남동생이 떠올라 누군가를 꼭 돕고 싶었다.” 며 “알라 신은 우리에게 어려움에 빠진 자는 누구든 도울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군 측은 오인 사격에 대해 즉각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저항운동으로 수감된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카티브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적에게 신장을 주지 말라.”며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참조: 국민일보, 한국일보 2005/11/0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우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움’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내 아들이 당했으니 나도 되갚아주는 것이 의로움일까요?
물론 단순한 의로움의 개념은 100원 꾸었으면 100원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카디브의 아버지가 이스라엘에게 보복을 했다면 그는 의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인 입장에서는 자녀도 다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마치 내가 잃는 것들이 나의 것인 양 여기며 화를 내는 것이 의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의롭지 못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의로움을 원죄로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의로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빚이 없었기 때문에 떳떳했습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떳떳함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해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며 당신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의로운 누군가가 죽어서 그 의로움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줘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이란 바로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거나 나무 뒤로 숨는 노력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를 갚아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교리서 617항 참조).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주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다 갚아주셨음을 믿는 것에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믿음을 통한 의화(義化)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의로워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의인인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처럼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특징이 이웃에게 화를 낸다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가다 금덩이를 주워 부자가 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으로 의로움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바치기 이전에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빨리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로 예물을 바쳐봐야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참된 의로움은 용서로써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의로움은 분노와 미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자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