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부활 제2주일]
사도행전 5,12-16
요한 묵시록 1,9-11ㄴ.12-13.17-19
복음: 요한 20,19-31
< 목적이 있는 삶과 없는 삶 >
같은 장소에 있어도 목적 없이 있는 사람과 목적 있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에 떠 있으면서 노를 저어도 방향을 모르면 그것은 그냥 고생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피고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
피고의 나이 겨우 24세. 출옥하면 40대 중반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자신을 버리고 떠날지 모릅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 동네 깡패들의 유혹에 넘어가 마약거래에 발을 디딘 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자네가 하는 청소는 엉망이야. 오늘부터 주방 설거지를 하라고.” 재소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설거지입니다.
끼니마다 1500명의 식판을 닦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와! 주방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는 주방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재미있었습니다.
설거지 하느라 손이 퉁퉁 부어올라도, 증기솥에 피부가 발갛게 데어도 주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신이 났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할 일이구나! 감옥에서 나가면 요리사가 되어야지!”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교도소 도서관에 들어와 처음으로 책을 읽고 신문도 보았습니다.
특히 요리에 관한 책이나 신문기사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가 모범적으로 주방 일을 하자 형도 10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한 음식점에 접시닦이로 취직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허드렛일을 자원하면서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큰 호텔의 주방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전국 최고의 요리사 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라스베가스 벨라지오호텔 총주방장인 제프 헨더슨(Jeff Henderson)의 이야기입니다.
천재들을 많이 배출하는 유태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신이 3000여 가지 재능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를 반드시 함께 선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태인은 자녀 교육의 목적을 그 재능을 찾아내 키워주는 데 둡니다.
즉, 인생의 배역을 찾아주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배역을 찾으면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결실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배역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데, 바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끌리는 일,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데도 잘되는 일이 자신의 배역인 것입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 인생은 연극임을 깨닫는 순간’, 김상운, 21세기 북스]
왜 어떤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힘겹게 겨우겨우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큰 성과를 내며 살아갈까요?
어쩌면 유태인들의 생각이 맞는 것 아닐까요?
인간은 무언가 만들 때 반드시 어떤 목적에 사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목적에 정확히 사용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내게 됩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실 때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아무것이나 하며 살라고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듯이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할 때 가장 좋은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원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자신감이 없어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공부도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 지방 대학에 진학해 의학 공부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간디는 겨우 5개월 버티다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전 재산을 털어 그를 영국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법을 전공하고 인도에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지만 사건을 따내지 못해 좌절감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을 맡아 법정에서 발언을 하려는 찰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냅다 줄행랑을 쳤습니다.
간디는 스스로 변호사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당시 영국령이었던 남아프리카로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백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른 도시에 가기 위해 기차 일등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인 경관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화물칸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습니다.
정당하게 돈을 내고 탔다고 따지자 경관은 간디를 기차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자신과 함께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에게 당하고 있는 인도인들의 수모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내 소명이구나. 힘없는 인도인들을 위해 싸우는 것.’
그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민사사건들을 해결해나갔고 억울한 사연의 인도인들이 모두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인도 본국에 알려지면서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배역을 찾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니체는 의미를 알면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여드레를 버텼다면 그것은 그냥 버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곧 자신의 역할을 아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배역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소를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확신이 사도들 가운데 머물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맡겨진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잠재워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그에 합당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존재이유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