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행전 4,13-21
복음: 마르코 16,9-15
<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 아니시다 >
어느 교사가 4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수업을 위해 잔디밭으로 나갔습니다.
교사는 반장을 사회자로 세우고 멀찌감치 떨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자를 중심으로 학생들 스스로의 안건을 선정해 토론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학생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두서없이 떠드는 통에 분위기는 시끌벅적해졌습니다.
보다 못한 교사가 사회를 보던 학생을 불러 질서를 잡아나가도록 종용했지만 어지러운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 학급에서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한 학생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크게 외쳤습니다.
“아하!”
학생들은 모두 말썽꾸러기가 드디어 중요한 말을 할 것이 있다고 믿었는지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더니 사회자를 향해 찡끗 윙크를 하였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자신에게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훨씬 수월하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구로산 강요식의 스피치 리더십 예화’, 구로친구넷]
각자가 자신의 주장만을 내다보면 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회자가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도 힘든 상황일 때 누군가는 그 사회자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 사회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친구들이 많아질 때 그 공동체의 일치의 힘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회가 단합이 되도록 이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일곱 마귀나 들렸던 여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둘은 여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실망하여 시골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당신 부활의 확신을 주신 다음 다시 제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도망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들의 모든 증언을 듣고 있는 열한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을 꾸짖으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며 파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과 ‘사도들’ 간의 묘한 대비를 나타냅니다.
보다 신앙이 강한 것은 제자들 중에서도 여자들입니다.
사도들보다 먼저 제자들이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사도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도들은 지금의 교황과 주교들입니다.
크게는 성직자들을 모두 포함한다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믿음은 분명 신자들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믿음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먼저 모이기를 원하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 받은 이들은 성직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그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교회가 하나가 되는데 먼저 협력해야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한 명에게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시어 나머지 사도들이 베드로 한 명에게 모이게 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하늘나라 열쇠의 힘이 베드로로부터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물줄기가 넷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 등장하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한 군데서 시작되지만 나중엔 세상을 모두 적실 양이 됩니다.
복음전파의 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구심점이 있어야합니다.
질서가 있어야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고 가족의 머리가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머리이고 아내가 몸입니다.
머리를 통해 몸이 움직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질서가 허물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히려 질서를 존중합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같이 하나의 머리가 되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머리는 성부이시고 몸은 성자이십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모였을 때 하나의 머리가 형성되고 그로부터 더 높은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흘러나오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각자가 주님과 맞닿은 사람들인 양 교회가 분열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선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치의 구심점을 아는 지식입니다.
자칫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치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뜻에서 벗어납니다.
개신교는 교회 일치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뽑으신 이들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교회가 혼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들은 일치가 마치 샐러드처럼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서로 버무려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일치는 마치 여러 과일이 잘라져 하나의 샐러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이 없으면 그 샐러드는 다 쏟아져버립니다.
일치는 과일들이 한 바구니, 한 접시에 담기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담겨야 하는지 그 구심점을 올바로 아는 이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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