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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19 조회수 : 479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 루카 18,35-43

< 행복하지 않은 이유 > 

인간 아기와 침팬지를 같이 키우면 침팬지가 인간을 닮을까요, 인간이 침팬지를 닮을까요?
1927년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는 아내를 설득하여 자신의 아들 도널드 켈로그를 구아라는 이름의 침팬지와 함께 키웠습니다.  
 
이 실험은 아기가 태어나기 3년 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윈스럽 켈로그는 인도에서 늑대에게 자란 아마라와 카마라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아기로 이 실험을 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더 받는지, 아니면 유전자적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는 없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통해 ‘침팬지가 아이처럼 자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침팬지처럼 자란다.’는 결과만 얻게 되었습니다. 
19개월이나 된 도널드는 침팬지와 자란 덕분에 사용할 줄 아는 단어가 3개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더 이상 자신의 아기를 침팬지와 키워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실험은 끝났습니다.

도널드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생겨야 할 아주 중요한 시기에 행복을 침팬지에게서 찾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생겨야 할 시기에 스마트폰만 쥐어준다면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은 뻔합니다. 
행복에 대한 잘못된 기준이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침팬지 구아는 본래 어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에게 길들여졌기에 부모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죽고 맙니다.  
 
도널드는 언어능력이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나중에 하버드 대학 의대에 진학해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죽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는 심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그로 인해 우울증을 겪어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실험에 이용된 도널드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충분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자신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려 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단지 실험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아버지가 그를 인정해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우울해 했고 더 이상 자신을 인정해 줄 부모가 사라지자 살아야 할 이유도 잃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진 아이는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을 때 다시 정글 속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늑대와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한 그에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을 믿게 해 주어야만 아이에게 행복은 곧 사랑임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칭찬해준다면 그 아이는 세상 것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또 다른 괴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도 참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을 행복으로 믿게 만드는 원숭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고 아무데나 똥을 싸는 게 행복입니다. 
인간으로 만들려면 먼저 아기에게 원숭이로부터 배운 행복관을 바꿔줘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바나나가 행복이라고 느끼면 다른 무엇이 다 채워져도 언제나 배고프게 돼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계속 행복할까요?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행복감이 극도로 상승됩니다. 
그러나 두 달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는 연구에서 다 증명된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그렇고 승진을 해도 그렇습니다.
분명 그런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믿었는데 왜 생각처럼 그 행복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스마트폰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 것들로는 행복할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음식만 먹어서는 그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믿고 돈과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 받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지 말아야합니다.  
 
자기에게 심겨진 것들이 거짓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모든 행복은 거짓입니다. 
아예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 믿는 눈먼 거지에게 세상 사람들은 그냥 조용하고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어. 돈도 있어야하고, 아이들도 잘 돼야 하고, 큰일을 이뤄야 행복하지!’라고 말하는 군중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고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우리 자신 때문이라고 돌을 들고 서 있는 바리사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그 소리는 무시해야합니다. 
인간은 숨만 쉬고 있어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어주실 만큼 존귀합니다. 
그렇게 사랑하시고 천국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아기가 부모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느님만이 행복이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는 그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눈을 떠봐야 세상에서는 여전히 천대 받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눈이 보여야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고 있다는 믿음 하나로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큰 것이 아닌 그저 굶지 않고 이슬 맞지 않는 삶을 살 수만 있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외적으로 오는 행복은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오랜 고통을 줍니다. 
주님 외에 행복이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는 이들에겐 종말이 참 기쁨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주님이 오시는 것이 재앙입니다. 
종말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우리의 죽음, 바로 이 종말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참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눈을 뜨게 된 소경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커다란 상을 받게 된다면 오늘 조금 힘들어도 기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이 기쁘지 못한 이유는 내 안의 원숭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아가 말하는 행복관을 믿지 맙시다. 
행복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행복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리고 행복합시다.  
 
사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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