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
[말씀]
■ 제1독서(이사 42,1-4.6-7)
바빌론 유배시대 동안 제2이사야 예언자는 이 세상의 궁극적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그려봅니다. 예언자에게 메시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존재, 성령으로 충만하여 인류에게 참 해방을 알리고 실현할 그분의 ‘종’으로 비칩니다. 진정한 해방은 따라서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하느님과 맺은 계약[세례]을 늘 새롭게 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 제2독서(사도 10,34-38)
유다교에서 개종한 첫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은 유다 공동체에 속해 있던 사람에게나 가능한 선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저자 루카로 추정되는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이 복음전파 사명에 나서기 이전 이미 성령이 이방인 세계에서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한계는 극복됩니다. 꿈속에서 하느님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던 로마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방문을 받은 베드로는 따라서 주님의 범세계적 활동에 대하여 찬미와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 복음(루카 3,15-16.21-22)
복음저자 루카는 세례를 받으시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평범하고 단순한 여러 사람 가운데 한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로써 루카는 자신에게 무엇이 하느님 계시의 정점인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천주 성령의 본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며,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은 비로소 성부의 아들로 밝혀집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새김]
신앙의 달력으로 성탄 대축일, 성가정 축일,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등 뜻깊은 축일들을 지내고, 오늘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구유 경배도 오늘로 마감되고, 내일부터 연중시기로 들어갑니다.
당신을 보여주셨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주님의 성탄과 공현과 세례는 크게 보면 공통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성탄을 통해 하느님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제한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공현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와 함께 본격적인 공생활, 복음전파 사업, 구원 사업에 뛰어드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우선 떠오릅니다. 더욱이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회개가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세례성사의 본질이 밝혀지고 완성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가운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등 4복음서에서 공통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처음 밝혀지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세례 장면입니다. 성자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이어서 성부의 말씀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 그 사랑을 나누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을 상실했을 때 이를 돌이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이 사랑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늘 함께하고 계시는 분이 사랑 넘치는 하느님이심이 선언되는 장면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 자격이 부여됩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니 모두가 평등한 것은 당연합니다(2독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십니다. 세례성사의 보증은 따라서 기도임이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세례는 받았을지 몰라도, 미신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필요에 따라, 특히 불의와 인권 유린 문제로, 사회운동에 뛰어들 때도, 기도하면서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일반적인 사회운동과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는다면, 세례성사를 통해 부여받은 하느님 자녀에 대한 의식 또는 그 믿음이 엷어지거나 사라져 갈 것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복음전파 사업에 뛰어드십니다. 하느님의 뜻인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행동하는 신앙인,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민족들의 빛으로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한 구원 사업에 투신하십니다(제1독서).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言行一致), 아는 대로 행동하고(知行一致), 믿는 대로 행동하는(信行一致) 신앙인의 모습이야말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 곧 하느님 자녀됨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이며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앙인, 세상의 고통과 불행 앞에서 하느님이 세워 놓으신 대책으로서의 신앙인의 모습이 너무나 절실한 세상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늘 기도를 먼저 앞세우며 행동하는 신앙인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겠습니다. 또한, 제2독서의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자녀 또는 제자다운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다른 이들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선교활동에도 충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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