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앞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기원미사 소식을 전해드렸는데요.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의 삶과 신앙을 김영규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기자]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자 첫 번째 신학생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지난 1821년 3월 1일 충남 청양 다락골 인근의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이때가 1835년 말입니다.
그리고 만 15살이던 1836년 12월 3일.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명의 신학생은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842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명으로 마카오를 떠난 최양업과 김대건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이동해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이어 184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먼저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귀국로를 물색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온 밀사들에게서 1846년의 병오박해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몇 차례 귀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뒤 1847년 상해로 이동했습니다.
마침내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뒤 밀사들의 도움을 받아 같은 해 12월 3일 귀국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부터 전국의 신자 공동체를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줬습니다.
최 신부는 1850년 초부터 장장 11년 6개월 동안 쉼 없이 사목방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했습니다.
아울러 선교사의 입국을 돕고 조선 신학생들을 유학 보냈습니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경남 지방 사목방문을 마친 뒤 베르뇌 주교에게 결과를 보고하러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선종했습니다.
당시 나이 만 40세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당대의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조선 팔도를 누빈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부릅니다.
CPBC 김영규입니다.
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김영규 기자 hyena402@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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