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51-56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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