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은 그의 제국을 심각하게 약화했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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