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 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 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절)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절).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 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 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 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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