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 세 벽돌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세 명의 벽돌공이 일하는 현장을 지나갑니다. 그는 세 명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각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벽돌공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인식해서 ‘벽돌 쌓기’라는 직업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벽돌공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관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이에 따른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와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성과는 어떨까요? 어떤 태도와 관심에 따라 성과에 분명히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 있고 큰 목표와 가치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 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로? 아니면 그저 자기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직업적 행위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힘차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그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려는 사람도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의미를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더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의미를 찾아야 우리가 되어야 분명 지금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에 머물면서 생존만을 또 직업적인 선택만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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