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어느 주일 오후, 한가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계시던 형제님께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휴대전화에 자기를 뭐라고 저장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아내 휴대전화가 앞에 있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술 단지’라는 호칭이 아내의 휴대전화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인생의 동반자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를 술 단지라고 부른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고 그런 아내가 너무나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얄미운 여자’라고 바꿔서 저장했습니다.
며칠 뒤, 아내가 이를 알아챘나 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울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스물여섯 살에 시집와 이사만 열네 번씩 하며 어렵게 아이들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 많은 호칭 중에 ‘얄미운 여자’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남편 역시 자기도 할 말이 없지 않다면서, ‘술 단지’ 호칭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휴대전화에 저장한 호칭 하나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남편은 그 순간에 화가 많이 났지만, 자기가 속 좁은 모습을 보였다고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연락처 속 아내의 호칭을 ‘평생 고마운 사람’이라고 바꿉니다.
며칠 뒤, 아내가 저장한 자기의 호칭을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한 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면서, 요즘에는 서로 좋은 말만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이익과 편리를 생각하면서 때로는 상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늘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받는 것만 당연하고, 더 나아가 받는 것에도 불평불만으로 원망의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는커녕 몹쓸 짓만 합니다.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지만, 이 중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모두 임금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혼인 잔치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작은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강한 연대감을 느낀다(아키코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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