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9,18-26
<우리는 절망하지만 주님은 희망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조차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장례식때 등장하는 피리부는 이들까지 등장한 것을 봐서,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되찾은 회당장 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딸 역시 사경을 헤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술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 완전히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완전하신 주님만이 소생시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그 날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워했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 의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더 이상 병고도, 죽음도 없는 삶, 불사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희망을 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 당당히 맞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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