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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6-27 조회수 : 467

마태오 7,21-29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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