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순결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구약은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천할 수도 없고, 실천하더라도 위선적으로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런던입니다.
바질 홀워드(Basil Hallward)는 나이 든 화가입니다.
그는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의 인상적인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도리안은 젊고 아름답고 돈도 많습니다.
그것을 오래 남겨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림을 본 헨리 워튼 경은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냉소적인 귀족입니다.
그는 도리안에게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즐기라고 충고합니다.
도리안은 헨리의 말을 듣고 앞으로 잃어갈 자기 아름다움을 미리 아까워합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질투합니다.
초상화는 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와 자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초상화는 늙어가는데 도리안은 초상화처럼 그대로 젊음을 유지합니다.
도리안은 자기 아름다움을 통해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 와중에 그를 좋아했던 여인이 자살합니다. 그래도 도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다만 런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도리안은 자기의 비밀을 알고 초상화를 지닌 화가 바질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바질을 살해합니다.
초상화까지 없애기 위해 칼을 댔더니 초상화가 원래 그대로 젊어지고 도리안은 그 초상화의 나이 든 추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가 찌른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도리안은 외모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추해지는 그림은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는 육체에 반대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외모에 치중하면 마음이 죽고 마음에 치중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성령의 관심사”로 번역하기보다는 “영의 관심사”로 번역했어야 옳습니다. 영이나 성령이나 다 마음에 관계됩니다.
마음 안에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믿음을 넣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믿음이 어떻게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의 정결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욕망하던 여인이 나의 누이동생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혹은 ‘엽기적인 그녀’에게서처럼 성전환자라면?
아마 올라오던 욕망이 바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영화 ‘더 몽크’(2011)는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의 1796년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도미니크 몰(Dominik Moll)이 감독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주인공 암브로시오는 어렸을 때 수도원에 버려져 처음부터 수도원에서 자라며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결국엔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범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여동생임이 밝혀집니다. 그러자 그는 곧 회개하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택합니다.
욕망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데 두 발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라고 하십니다.
그 정체성만 가지면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성적인 욕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정결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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