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마음의 안식을 얻는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하는 날이고 사제들은 그렇게 결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일은 바로 ‘행복’에 의해서입니다.
누구나 행복한 것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고통당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흘리실 때의 기분은
이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무언가 이루시려고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양심이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셨기에 빚진 존재로서 아버지께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냥 눈 한 번 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 뒤에 올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양심이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이 지상에서 생명을 받고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시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브라질에서 한 유기견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아직 탯줄도 잘리지 않은 신생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개는 신생아를 물고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려가 문을 긁으며 짖고 사람을 불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기를 보고 병원에 데려가자 개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신생아는 살아났고 몸에는 이빨 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이 개는 왜 아기를 인간에게 돌려주었을까요? 분명 유기견이 되기 전에 사람에게 길러졌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았기 때문에 양심상 신생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듯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받았는데도 주지 못할 때 양심이 만들어내는 불안함은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는 22년간 혼자 산 하나를 깎아서 길을 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산을 넘어가면 2km밖에 안 되는 거리를 아픈 아내를 데리고 60km나 돌아가야 해서 결국 아내가 병원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지히는 이웃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아내에 대해 미안함을 없애려고 평생을 그렇게 바친 것입니다.
양심의 평화가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 평화롭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을 바라보며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성심을 내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암에 걸려 돌아가신 얼굴이 환한 미소를 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 세실리아 가르멜 수녀님의
환한 미소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분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글로 썼습니다.
예수 성심의 고통과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난 매우 만족스럽다.
고통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놀랍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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