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28ㄱㄷ-34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려운 거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기 싫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 막시킬리아노 콜베 신부님이나 아무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섬에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다미아노 신부님,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저항하다 미사 때 총 맞아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등은 사랑이 곧 목숨을 내어놓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당했을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4명의 군목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이 USAT Dorchester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군인들이 구명정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각자의 구명조끼를
포기했습니다.
네 명의 군목—조지 L. 폭스, 알렉산더 D. 구드, 클라크 V. 폴링, 존 P. 워싱턴—은 팔짱을 끼고 함께 기도한 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위 네 명의 군목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은 부활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남편의 더 큰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생존부터 걱정하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입니다.
개신교의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가도 목숨 줄 앞에 놓이게 되면
오줌을 지리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자살합니다.
죽음을 온전히 맞이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심판이 두려워 그냥 그렇게 고통받고 사는 게
싫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리서치에 따르면(Pew Research Center) 대부분 사회에서 가족은 삶 의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질적 복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진정한 가치, 곧 진정한 계명을 잊게 된 걸까요? 누구도 자기를 장님으로 만드는
욕망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사두가이들은 지극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추구하며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이러한 잘못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시면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이것이 삶의 끝니 아니라고 믿게 될 때는 사람이 180도 바뀐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나 완전한 희망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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