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며 시련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최약체 동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살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약함으로 인해 지금 인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형성했던 공룡, 맘모스 등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마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확장되어서,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통이 없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고통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검진 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운동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루 1시간 만이라도 운동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첫째 날 운동하기가 쉬웠을까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둘째 날, 온몸이 뻐근하고 힘듭니다. 그래도 버텨서 해 봅니다. 셋째 날, 작심삼일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요.
힘들어도 목표가 있으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멀고 힘들어도 점차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고통과 시련 너머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거부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의 목표인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스탕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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