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기도를 배우는 한 수련자가 스승에게 달려와 외쳤습니다.
“스승님! 제가 드디어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나?”라고 물었고, 제자는 18년이 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갠지스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는 이 질문에 18루피(한화 300원) 정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를 벌었군.”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기도는 과연 필요한 기도였을까요? 배를 타고 가면 그만이니 필요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 성취에 도달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기도를 세상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절망도 또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만 바라보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의 길이 아닐까요?
군중이 예수님께서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성취,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청하기만 할 것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채워야 진정한 하느님이라면서 엉뚱한 곳에서만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갖 불평과 원망 속에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나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주거지를 선택할 때는 그 마을 사람의 따뜻한 인정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공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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