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요. 그런데 ‘나’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믿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늘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클까요? 아니면 자녀의 사랑이 더 클까요? 부모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자녀를 키워 본 부모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계속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의문만 있었지요. 자기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말씀하셨기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선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자신 있게 자기 삶을 살아가며,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음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이해인 수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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