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
2001년에 개봉했던 ‘진주만’이란 영화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만이 아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테네시주에 사는 두 젊은이 레이프와 대니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란 죽마고우입니다.
이들은 둘 다 미공군 비행사가 되었고 레이프는 미해군 간호사 에벌린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레이프는 유럽으로 배치 받고 대니와 애벌린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으로 배치 받게 됩니다.
레이프는 독일군과 교전 중에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처리 됩니다.
레이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애벌린은 대니에게 의지하게 되고 대니 또한 애벌린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이프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고 이 셋은 애매한 삼각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애벌린은 이미 대니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레이프는 그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이 둘이 일본을 다시 공격하러 갈 때 대니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대니는 결국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고 다시 레이프가 애벌린과 대니의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삼각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여자는 한 남자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차지하며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주인이 한 집에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려고 하지만 그 경쟁자가 있습니다.
두 경쟁자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니 뱀이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넣어준 뱀을 당신 스스로 제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발과 연관이 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 사람의 발을 물어 목숨을 빼앗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건널 때 모래 속에 숨어있는 뱀들에 의해서 많이도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뱀에게 물려죽을 때 그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이유를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뱀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게 시스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따먹게 만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집엔 뱀이 살게 되고 하느님이 나가시게 됩니다.
뱀이 사는 집은 영원한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 외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중요한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뱀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주었던 다른 맛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가졌던 마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지만 광야에는 ‘생명의 빵’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성체는 이제 신물이 나고 돈이나 명예나 쾌락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불뱀을 내려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결국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자신인 자아, 즉 뱀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후회하고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지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스스로 매달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높이 매달리심으로써 우리가 그 모범을 보고 따라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자아, 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방법으로 믿고 따라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주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인을 하느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을 베인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어놓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명령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마치 성모님께서 발로 밟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야만 하지만 뱀이 머리가 돼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뱀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칼로 우리 목을 쳐서 잘라내야만 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머리로 오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우리 목이 잘려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뱀이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미운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매번 내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물어 살해합니다.
그런데도 자아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고 타협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너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본성상 하느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회개되어질 수 없다면 십자가에 매달거나 감옥에 가두어 놓거나 목을 잘라버리거나 성모님처럼 발로 밟고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