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5,17-19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종래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인들의 특기였던 이분법적인 가르침, 과도한 흑백논리, 폐쇄성과 편 가르기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 사상에 깊이 빠져, 자신들만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원의 뜰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두드러진 특징이 개방적이요 통합적이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 단편적이거나 편향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잔뜩 사로잡힌 유다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할 것인지?
동료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피조물과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과몰입입니다.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은 뒷전이고, 오로지 율법 한자 한 획에
과몰입되고 혈안이 된다면 바로 율법 지상주의입니다.
율법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의 준수 여부를
이웃들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 지상 주의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지나친 성전 중심주의입니다.
물론 성전과 성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역시 거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좁디좁은 성전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 두목이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성대한 잔치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세리 두목의 집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루는 갈릴래아 호숫가 한적한 풀밭에 오 천명이나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미사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풀밭을 성전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에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비린내 나는 골고타 언덕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수많은 성당과 예배당 안에도 거처하시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주점에도 현존하시고, 노래방에도 현존하시고, 식당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 모든 장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물론 그곳에 비록 때 묻고 남루하지만 거룩함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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