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7,24-30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이유
영화 ‘백조의 노래’(2020)는 깊은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생각을 자극하는 공상 과학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카메론 터너에 초점을 맞춥니다.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카메론은 스콧 박사로부터 혁신적인 과학적 해결책을 소개받습니다.
그 해결책은 자신의 클론, 즉 모든 면에서 같지만, 불치병이 없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은 스콧이 죽어도 그것을 모르고 제2의 스콧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기 대신 자기의 복제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이 이미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더 주는 자기 이기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콧 박사에게 청합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왠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아내나 아들이 두 카메론을 동시에 보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복제 카메론은 자기만큼 카메론을 아는 인간이 없기에 자기가 숨어줍니다.
카메론은 그런 자신의 복제 인간에게 가족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콧 박사도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카메론이 편하게 죽게 해주는 좋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카메론이 스콧 박사에게 무언가 청할 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은 믿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로 페니키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악령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언가 이 여인처럼 목숨을 걸고 청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 청할 때 우선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강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도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대에게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과 자비가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청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자비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결국 내가 이용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주님을 좋은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모진 분으로 여겨 불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주님께 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칼과 총을 사달라고 청한다면 부모가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아서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에 어긋남을 알기 때문에 계속 청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기 딸이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면 내 청함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도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자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헛갈릴 때는 주님의 기도나 십계명, 혹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는 것이라면 죽기까지 청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는 이의 청을 주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거나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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