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잠에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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