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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6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1-16 조회수 : 684

우리가 자주 빠져들게 되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확대해석, 침소봉대, 과잉 일반화입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강의 시간인데, 제일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강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만지작만지작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일관 그러시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강의 시간에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십니까?
게임 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시는 말씀! “ 그게 아니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강의 내용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깨갱 하며 그랬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적으세요.” 
 
또 다른 제 착각이랄까, 과잉 일반화 증세가 떠오릅니다.
특강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유튜브 강의 잘 활용하고 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은 잠 안올 때면 즉시 제 유튜브 강의를 트신답니다.
잠 오기 적절한 목소리라 불면증 치료제로 최고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바리사이들 역시 저처럼 확대해석 내지는 침소봉대를 한 것입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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