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를 처음 배울 때, 얼마나 당구가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흠뻑 빠지다 보니 계속 당구만 생각나더군요.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천장이 당구대로 보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천장의 무늬가 보이면서, 그 무늬에 따라 당구공이 배열되고 이를 어떻게 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강의하실 때도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고 교수님께서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흰 공, 빨간 공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통 당구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특히 초보자일 때 그렇게 됩니다. 축구할 때, 공만 쫓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보자입니다. 그러나 실력자는 어떨까요? 주변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공을 처리할지 판단하면서 공을 찹니다.
이 세상 것만 집중하며 사는 모습은 초보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주님께서 도움을 주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바라보며 앞으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실력자의 삶은 세상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면서 자신의 삶을 방향 짓습니다.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이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실력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탄생 예고가 성모님께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 어떤 가문에 속해있는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아주 평범한 여인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은 평범한 사람이 사는 평범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봐야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일을 보신 분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처럼, 하느님의 일은 이 세상 안에서 언제나 가능한 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온다고 해도,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다(루이제 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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