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여행을 갔습니다. 이렇게 과거행을 쓰는 이유는 이제 여행을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좋은 여행을 위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 여행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즐길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풍요로운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여행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공부할 필요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쉼에만 집중하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갑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의 연관성, 그곳 성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성지에 다녀왔어도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할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어떤 신부가 제게 “너희 동네의 그 집 가봤어?”라면서 맛집을 물어봅니다. 처음 들어보는 집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셔도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을 보는 순간에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기에, 사제들을 조로 나누어서 차례로 한 주일 동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면 복음에서 보듯이 제비뽑기하여 분향할 사제를 정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주님의 천사를 만났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루카 1,12)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13)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온 존재, 결국 주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뻐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주님 알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기쁨의 감정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큰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아리스토텔레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