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7,10-13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킬로미터이지만, 그는 약 24,000킬로미터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 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 받는 콜럼부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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