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고 오셔야 할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이사야서는 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 권고한다(이사 40,3-5).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40,9-11). 주님의 가장 위대한 오심은 당신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 오심은 화해와 사랑의 오심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40,11). 그분 안에서는 권위와 사랑이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업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 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의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오심은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이는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해서 참여하여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의 힘을 지닌 기다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