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2,46-50
자녀의 봉헌은 새장의 문을 열어주는 것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날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6세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결혼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당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바탕으로 다윗의 후손 여인들을 성전에서 교육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예쁠 나이의 귀여운 딸을 성전에 봉헌해야 하는 늙은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팔을 한쪽 잘라내는 것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은 아이들을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태어나고 길러져서 부모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기에 부모가 놓아주지 않으면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장에서는 나는 법을 배울 수 없고 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면 큰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괴물 대신 쓰레기로 2층까지 꽉 찬 트레시 홈’이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이층집이 온갖 쓰레기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자 아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은
치우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착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이를 긍정하면서 본인들도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이번 주 주일 교중미사에서 아이들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때 특별 순서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단에 봉헌하고 ‘요게벳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요게벳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든 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요게벳은 어쩔 수 없이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바구니는 악어에게 먹힐 수도 있고 지나가는 배에 깔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공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자라며 더 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참 소명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요게벳이 아이를 자기 품에만 안고 있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도, 모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게벳의 노래 가사를 살펴봅시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만약 이태석 신부님을 어머니가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태석 신부가 지금까지 쌓아 주님께 가져간 보화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이태석 신부를 진정으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너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있다!”여야지, “우리가 있으니 우리 품 안에 있으면 안전해!”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녀를 새 장 속의 새처럼 자신들 크기 안에 규정하는 일이지, 절대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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