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제 서품을 받고서 제일 고민되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해소 안에서 훈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 교우가 참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으셨으면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훈화의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젊은 제가, 또 경험 없는 제 말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늘 조심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고해소에 들어간 지, 벌써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과 새 사제였을 때의 제 모습을 비교하면 정말로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당연하고, 내적인 모습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훈화, 강론, 강의….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첫 모습과 달리 처음의 순수한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꽤 많이 능숙해졌고 또 실질적인 도움도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하고 쉬운 것만을 하려는 안일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계속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성장이든 시간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 없이 곧바로 성장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곧바로 완성의 모습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나’의 존재가 너무 나약하고 부족하지 않을까요?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이 흐르는 시간 안에서 ‘나’의 생각이 차곡차곡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장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나의 이 몸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어떤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치유하셨을까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의 시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만이었습니다. 이 사람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특별한 선물도 받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구원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희망이 사라진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욕심과 희망을 비축해 두어라(발타자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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